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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1주기-바보가 바보들에게] <3·끝>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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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1주기-바보가 바보들에게] <3·끝>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었으나…"

입력
2010.02.1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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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과 살고 싶었음에도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은 주교나 추기경이라는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였음을 고백한다."

2004년 낸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썼다. 춥고 어두운 곳을 찾을 때마다 그는 청빈과 거리가 있는 자신을 자책하곤 했다. 회고록엔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왜 장애인들 수발 한번 들어주지 못했는가' '철거촌에서 자고 가라고 할 때마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같은 고백이 반복된다. 행려병자와 장애인들 속으로 투신해볼까 고민했던 초임 신부 시절의 머뭇거림은 평생의 짐으로 남았다.

"그분의 겸양이지요. 김 추기경의 머릿속에서 가난한 이웃이 떠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을 겁니다. 추기경이 되시고 가장 먼저 시작하신 일이 농촌에서 도시로 흘러온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이었어요. 덕분에 제가 완전히 발이 묶였지요."(웃음) 1968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뒤 1971년 김 추기경의 부탁으로 노동사목을 맡아 40여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도요안(73ㆍ본명 '잭 트리솔리니') 신부의 기억이다.

그는 소외된 이들을 위한 김 추기경의 열정을 이렇게 들려줬다. "노동자들이 관련된 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분은 급하게 저를 찾으셨어요. 느긋한 성품이셨는데도 '택시 타고 빨리 오십시오'라고 채근하시던 게 기억납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 때도 걸러, 주방에 라면을 부탁해 같이 그것을 먹으며 얘기를 계속했던 적도 있어요."

도 신부는 김 추기경의 따듯한 배려를 얘기하다가, 한국 사회가 매몰차게 변하고 있다고 말머리를 돌렸다. "얼마 전 법무부 장관이 한국에 이주노동자를 많이 보내는 나라의 수상에게 '불법체류자를 송환하는 데 협조해달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한국인들은 이제 그런 뉴스를 접하고도 무덤덤해요.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이 너무 빨리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김 추기경은 전태일 열사 사건(1970), 원풍모방 사건(1982), 상계동 철거촌 문제(1987) 등 한국 사회의 소외 현상이 불거질 때마다 만사를 제쳐두고 그 고통을 껴안았다. 그가 1998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직에서 물러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공식 업무는 재개발 철거촌 등에 세워진 선교본당(도시빈민 등의 소규모 가톨릭 공동체)을 교구의 공식 기구로 편입한 것이었다.

허윤진 서울대교구 신부는 김 추기경이 노동ㆍ빈민 사목을 맡은 사제들에게 했던 얘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 메시아는 아니다'라고 했어요. '우리의 손길은 너무 작고 바보스러울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앞장서는 모습이 선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것이라고 했죠. 그리곤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함게 이 일을 해 나가자'고 하셨습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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