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나가던 금융산업 적신호 앞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작년 초. 세계 금융시장에는 ‘영국 부도설’이 파다했다. 과도한 금융산업 비중, 취약한 국가 재정, 작은 경제 규모 등으로 결국엔 영국 경제가 금융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것이라는 설이었다. 당시 영국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바 있는 윌렘 뷰이터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영국이 ‘제2의 아이슬란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로부터 1년.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상당히 더디긴 하지만, 영국 경제는 언뜻 보기에 서서히 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6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의 긴 침체에서 벗어나 작년 4분기에는 미미한 플러스 성장(전기대비 0.1%)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금융위기는 겨우 벗어났지만, 더 큰 위기가 기다리고 있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치른 비용, 즉 1년 전보다 한층 악화된 재정이 영국 경제를 본격적으로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 포르투갈 등이 유럽 재정 위기를 촉발했지만, 진짜 유럽의 뇌관은 영국이라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나돈다. 시먼 존슨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국가 신용등급이 심각한 하락 압력을 받고 있는 나라에 영국도 추가돼야 한다”며 “영국이 금융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영국의 재정 상태는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이른바 ‘PIGS(아일랜드까지 합쳐 PIIGS)’ 국가들에 못지 않다. 영국 정부는 부실에 빠진 금융회사들을 건져내기 위해 국내총생산(GDP)의 90%에 달하는 1조3,000억 파운드의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고, 그 결과 재정적자는 급속도로 불어났다. 2007년 GDP 대비 2.7% 수준이었던 적자 규모는 이듬 해 5.5%, 그리고 작년엔 12.6%까지 치솟은 데 이어 올해는 13%도 돌파할 기세다. 2007년에 GDP 대비 36.5%에 불과했던 국가 채무도 올해는 80%를 넘어설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다 보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파운드화 가치도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향후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은 그 동안 영국 경제를 지탱시켜 온 금융산업의 추락이다. 금융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에 달하고, 법인세 세수의 4분의 1 이상을 맡고 있는 명실상부한 영국경제의 젖줄. 제조업기반이 이미 오래 전 무너진 상태에서 금융은 영국경제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하지만 지금 영국 은행들이 보유한 총 부채 규모는 GDP의 5배를 넘어섰고, 이중 절반이 넘는 60% 가량이 해외 차입금이다. 박형수 조세연구원 재정분석센터장은 “다른 국가들은 침체만 벗어난다면 재정수지가 개선될 수 있겠지만 영국은 금융산업이 무너지는 경우 도저히 단기간 내에 회복이 어렵다”고 말했다.
영국이 일명 토빈세라고 불리는 금융거래세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단기성 외환거래 등에 세금을 물리자는 것인데, 영국의 자존심인 금융을 쥐어짜야 할 만큼 재정상태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이처럼 영국은 금융과 재정이 밀접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재정위기가 현실화한다면 그 파장은 끔찍할 것으로 보인다. 재정이 악화되면 파운드화 가치는 폭락할 것이고, 영국을 떠받치고 있는 해외자금의 이탈로 금융마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월스트리트와 함께 세계금융의 중심인 시티(런던 금융가)가 몰락한다면, 그것은 또 한번의 글로벌 금융위기일 수 밖에 없다.
그리스 포르투갈 재정위기의 전염가능성도 불안한 요인이다. 비록 전문가들은 가능성을 높지 않게 보지만,‘남유럽 등 재정 불안 증폭 → 세계 금융시장 패닉 → 영국 금융산업 추가 손실’의 시나리오는 외면할 수 만은 없는 형편이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은 “영국의 파운드화는 기축통화가 아닌데다 국채 발행의 상당 부분을 외국 투자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불안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하워드 데이비스 런던정경대 학장 인터뷰
“영국이 국가부도가 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재정 악화가 향후 수년간 영국의 경제성장을 둔화시킬 것이다.”
하워드 데이비스(사진) 영국 런던정경대(LSE) 학장은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영국의 재정 위기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그는 영국의 초대 금융감독원장을 지낸 인물로 영란은행 부총재로도 2년간 재직했다.
-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나라 중 하나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일단 금융 부문이 경제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크다. 지속된 플러스 성장에도 불구하고 공공지출이 급속도로 늘었고, 이 때문에 국가 재정이 적자에 빠진 것도 한 원인이다. 한때 법인세의 28%에 달하던 금융 부문이 무너졌으니 앞으로 국가 재정 악화도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영국의 채무불이행(디폴트)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지금 영국의 재정 상태는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가.
“비록 재정 상태가 좋지 않긴 하지만, 영국이 디폴트 상태에 빠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영국 정부는 세금을 올리고 재정지출을 억제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영국의 사회적 안정 수준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경제ㆍ사회적으로 타격을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부가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세금 인상과 재정지출 축소가 향후 수년간 경제 성장을 둔화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유럽 국가나 미국, 일본 등의 재정 상황과 비교를 하면 어떤가.
“일본이나 이탈리아보다는 국가 부채가 더 적지만, 프랑스 독일 미국보다는 빚이 더 많은 상황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에 비해 재정 상태가 더 좋지 않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면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100%까지 치솟는 최악의 상황으로는 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재정 악화를 막기 위해 영국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고소득자에 대해 일부 세금 인상을 발표했다. 4월부터 최고구간 소득세율이 50%로 높아질 것이다. 재정지출 축소방안도 발표했다. 하지만 5월 총선 전까지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중대한 조치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총선에서 집권이 예상되는 보수당은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고 세금을 높이는 패키지 방안을 내놓고 있다.”
-너무 일찍 출구전략을 단행하면 경제 회복에 찬물을 끼얹고, 너무 늦으면 재정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우선 순위를 어떻게 보는가.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하다는데 동의한다. 작년 4분기 영국 경제는 아주 미약하지만 성장세로 돌아섰다. 만약에 이런 성장세가 올 상반기에도 이어진다면 재정 건전화 조치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외 채권이 많은 나라에게 재정 건전화가 늦춰지고 국채시장의 신뢰가 무너지는 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 5월 영국 총선이 분수령… "적자 절반으로" 공약 보수당 우세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 재정문제는 정치상황과 직결되어 있다. 영국 역시 재정위기의 분수령은 5월 치러질 총선이 될 전망이다.
총선 이전까지는 표심을 의식해 적극적인 긴축 재정에 나서기는 어려운 처지. 총선 이후 얼마나 강력한 구조 개혁이 추진되느냐에 위기 해결의 성패가 달렸다는 진단이다.
현재로선 14년만의 정권 교체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제1야당인 보수당이 고든 브라운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에 줄곧 앞서고 있다. 보수당은 집권 노동당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재정적자를 삭감시킬 것이라고 공약한 상태. 앞으로 4년 내에 재정 적자를 절반 수준으로 감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문제는 보수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느냐는 점. 당초엔 압도적 승리가 예상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노동당과의 지지율 격차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만약 보수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할 경우 자유민주당 등과의 연정이 불가피하고, 이렇게 되면 재정개혁추진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보수당의 입장이 갈수록 무뎌지는 것도 이런 지지율 변화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 노동당 정권 역시 공무원 임금을 삭감하고 국방예산을 대폭 줄이는 등의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총선의 벽에 부딪쳐 있는 처지다. 당장 공공ㆍ민간서비스 노조가 파업을 벼르는 등 저항도 거세다.
일각에선 재발한 영국병을 해결하려면, '대처의 부활'만이 해법이란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은 "총선 후 보수당이 1980년대 대처수상 식의 강력한 구조 개혁에 나서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했다. 박형수 조세연구원 재정분석센터장도 "보수당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만큼 지지를 받을 수 있을 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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