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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1세기 복싱클럽' 女복서 4명 국가대표 선발전 앞두고 맹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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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1세기 복싱클럽' 女복서 4명 국가대표 선발전 앞두고 맹훈련

입력
2010.02.09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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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사각(四角)이 아니야. 사각에 몰리면 죽어! 그래서 사(死)각의 링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상대편 주먹을 피해라. 맞아 죽고 싶지 않으면!"

3일 오후 7시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21세기복싱클럽. 박현성(42) 관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100㎡(30여평) 남짓한 체육관을 삼켰다. 링 위에는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힌 가냘픈 체격의 여자 복서 4명이 주먹과 발을 쉴새 없이 움직였다. 눈빛은 지켜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만큼 매서웠다.

이들은 국내 첫 여자복싱 올림픽 출전을 꿈꾼다. 그간 올림픽에서 복싱은 금녀(禁女)의 종목이었다. "여자가 대놓고 쌈질이냐"는 케케묵은 편견 탓이다. 그런데 지난해 국제올림픽위원회는 2012년 런던올림픽부터 여자복싱을 정식종목으로 채택했다. 메달은 과욕일지라도 출전만으로 '최초'라는 타이틀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사실 올림픽 출전도 이들에겐 드높은 목표다. 올해 아시안게임(중국 광저우)에도 여자복싱이 처음 열리지만 '첫' 타이틀에 대한 욕심은 살짝 내려놓았다. 어디까지나 2년 뒤 올림픽을 일편단심 바라볼 뿐이다. 박 관장이 거느린 여성복서들의 프로필을 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민현미(33): 2004년 TV에서 본 복싱소재 영화에 감동받아 글러브를 끼다, 대우건설 회계팀 근무.

-소민경(25): 2008년 영화 '주먹이 운다'의 실제모델인 박현성 관장의 기사를 우연히 읽고 링에 오르다, 중소기업 직원, 현재는 그만 둠.

-이혜미(20): 2008년 그냥 부실한 체력을 키우려고 체육관 문턱을 넘다, 숭실대생.

-박주영(27): 2009년 행정고시 보호감찰직 시험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복싱을 배우다, 서울대 연구원.

다들 처음부터 선수로 뛸 생각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복싱을 하면서 삶이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소씨는 복싱에 매진하기 위해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도 관뒀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삶의 목표까지 바꾸게 했을까?

이들은 '삶의 빛'이라고 표현했다. 민씨는 "처음 링 위에서 심판이 이겼다는 의미로 제 손을 치켜드는 순간, 제 인생이 가장 빛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고 떠올렸다. 이씨는 "홀어머니가 반대했지만 링 위에 서면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깡그리 잊혀지고 빛이 보인다"고 했다. 박씨는 "내성적인 성격이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내게 한다"고 거들었다. 말수가 적은 소씨는 "경제적인 여유도, 잘난 것도 없지만 링 위에서만큼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고 꾹 눌러 말했다.

그러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대학에 갓 입학한 이씨는 어지간한 학교활동은 빠져도 훈련은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는다. 민씨와 박씨는 생계를 위해 직장에 나가면서도 매일 새벽훈련(오전 5시)에 꼬박꼬박 참석한다. 그 숱한 하루가 모이고 모여 올림픽 출전이란 거대한 꿈을 꾸게 한 것이다.

삶을 달래주고 북돋우는 복싱이지만 어려움도 있다. 적은 링 안팎에 있다. 처음엔 날아오는 상대의 주먹을 막기가 힘들었고, 남을 때린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박 관장은 나약한 심성을 바꾸려 지옥훈련까지 동원했다. 살아있는 장어를 이로 뜯고 씹게 하는가 하면, 암흑 속에서 1시간 넘게 샌드백처럼 거꾸로 매달리게도 했다. 덕분에 "펀치에 힘이 실리고"(민), "악을 쓰고 더 강해진"(소)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링 밖의 적은 돈이다. 박 관장과 선수 4명, 코치까지 6명이 대회에 한 번 참가하려면 37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비인기종목인지라 애당초 국가지원도 없다. 그렇다고 선수들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박 관장은 그간 모은 돈과 지인들이 십시일반 걷어준 지원금을 쓰고 있다. 얼마 전엔 자신의 꿈을 건 지원자에게 1억원 정도의 상금을 준다는 주류회사 공모전에도 출품했다. 박 관장은 "1년에 1억원만 있다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자신했다.

박 관장은 복싱의 영예와 좌절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잘 나가던 선수시절 1984년과 88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2위를 차지한 게 억울해 글러브를 내팽개쳤다. 그 뒤 조직폭력에 몸을 담고 분신자살을 기도하는 등 방황도 했다.

그런 그가 글러브를 다시 낀 건 4명의 제자 덕이다. 원래 일반인에게 복싱을 알리자는 취지로 시작했던 주말 취미반에서 이들을 차례차례 만난 것이다. 민씨는 2005년과 2006년 연달아 전국체전에서 여자복싱 우승을 거머쥐었고, 소씨도 전국여자복싱대회(48㎏급)와 전국체전(52㎏급)에서 우승했다.

박 관장은 "이 녀석들 덕에 제가 이루지 못한 올림픽의 꿈을 다시 꾸게 됐다"고 울먹였다. 제자들이 다독였다. "외롭고 지쳐가는 링 위에서 유일한 힘은 관장님의 응원인 걸요. 우?함께잖아요."

4명의 여성복서는 3월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한다.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운을 바라지는 않는다. 아직 올림픽은 2년이나 남았다. 실력을 갈고 닦기엔 시간이 충분하다. 혹 아는가, 이들 중에서 올림픽 출전을 넘어 메달이 나올 수도 있다.

강지원 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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