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궂고, 바람은 차고 매웠다.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에서 간간이 흘려내는 빗발이 비행기 소리를 내며 수평으로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중산간 길에 펼쳐진 억새들은 일제히 누웠다 일어서고, 귤 밭 돌담 안에선 농익은 열매가 떨어져 검은 흙 위를 꽃처럼 굴렀다. 봉오리를 채 열지도 못한 동백이 바람 한 줄기에 후두둑, 그야말로 핏빛 꽃잎들을 골목길에 흩뿌려댔다. 고개를 들면 멀리 한라산 영봉이 눈구름 속에 갇혔고, 눈길을 낮추면 구름 사이로 빠져 나온 햇살이 바다 위로 깨알처럼 부서졌다. 지난 주 경험한 제주 올레의 풍경이다.
▦마침 제주도가 관광산업 통계치를 내놓았다. 원래 겨울철은 제주 관광의 비수기. 그런데도 지난 1월 한 달 제주도를 찾은 관광객이 51만 명을 넘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처음으로 관광객 600만 명을 넘겨 잔뜩 고무됐던 제주도는 1월의 놀라운 성과가 이어지면서 머지않은 장래에 꿈의 목표인 1,000만 명 관광객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면 관광 조(粗)수입은 무려 6조원에 달하게 된다. 내실에 비해 비싼 이미지 등으로 오랫동안 관광침체기를 겪었던 제주도로서는 대단한 약진이다.
▦가장 큰 공은 올레 트레킹 코스에 돌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2007년 9월 첫 코스가 개발되고 단 2년여 만에 관광객이 100만 명이나 급증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1983년 관광객 100만명 돌파 이후 올레 개발 전까지는 100만 명 증가에 4~10년이 걸렸다. 성산에서부터 시작해 대개 15~20km 정도씩 구간을 끊은 올레 코스는 남쪽 바다와 오름들을 들러 이제는 북제주까지 이르는 15코스까지 완성돼 있다. 이 정도면 길이도 만만치 않지만, 무엇보다 변화무쌍한 풍광의 아름다움은 세계의 어떤 트레킹 코스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듯싶다.
▦그러니 일상이 답답해지면 툭 털고 떠나 한 번쯤 그 길을 걸어볼 일이다. 혼자여도 좋고 친구, 부부끼리여도 좋겠다. 중년이라면 머지않아 품을 벗어날 장성한 자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도 좋을 것이다. 오름의 억새를 헤치고 발끝에 닿는 파도를 건드려가며 하염없이 걷다 보면 서로 간에 못 전한 속내를 드러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석양 무렵 긴 그림자를 끌어 하루 여정을 접을 때쯤이면, 지친 만큼 두터워진 삶의 의미를 새삼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란 게 어차피 올레의 나그네길과 다르지 않으므로.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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