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 9명 탄생…일제, 맥 끊으려 앞마당에 철로 설치해
퇴계 이황으로 대표되는 유학의 본고장, 경북 안동. 안동역에서 낙동강변 도로를 따라 안동댐 방향으로1㎞쯤 가다 보면 왼편의 철길 방음벽 너머로 오래된 기와집이 보인다. 아흔아홉 칸 고택으로 알려진 임청각(臨淸閣)이다. 높은 방음벽에 가려 지붕만 겨우 보이는 이 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ㆍ1858~1932)의 생가다.
안동시 법흥동 20번지,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법흥종택이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살림채, 별채 사랑인 군자정(보물 182호)과 사당으로 이뤄진, 500년 된 아름다운 고택이다. 안동 사람들은 아흔아홉 칸 집 하면 다 안다. 관광 안내 지도에도 나온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임청각 주인 석주 일가와 후손들이 피와 눈물로 써내려 간 독립투쟁의 역사는 잘 모른다.
이 집에서만 무려 9명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다. 석주와 아들 준형, 손자 병화의 직계 3대와 동생 상동 봉희, 조카 형국 운형 광민, 종숙 승화까지 4대가 독립운동을 했다. 그로 인해 가문이 기울고 후손이 고초를 겪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임청각 앞에 섰다. 대문 앞에 높이 솟은 철길 방음벽이 답답하다. 낙동강을 굽어보는 산 기슭에 자리잡아 조망이 시원하던 집인데, 1940년대 일제가 임청각 앞마당을 관통하는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앞이 막혔다. 그 때 아흔아홉 칸에서 3분의 1 이상 잘려나가 50여 칸만 남았다. 안동 사람들은 일제가 독립운동의 맥을 끊으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믿는다. 아닌 게 아니라 안동역에서 임청각을 지나 영주 방향 옹천역까지 가는 철도 노선은 기형적이다. 직선이 원칙이건만, 두 번 꺾어 3개의 터널을 뚫었다.
종일 땅을 울리며 달리는 열차 소리에 임청각은 평온하지 못하다. 현재 고택 체험장으로 쓰이고 있는 이 집에서 묵는 손님들은 한밤중 열차의 굉음에 놀라 “배 위로 기차가 지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임청각 골목 끝에 있는 국보 16호 법흥사 7층 전탑이 열차 진동에 기울었다는 얘기도 있다.
임청각에 석주의 후손이 산 것은 손자며느리인 종부가 끝이다. 여름이면 서울에서 내려와 지내던 그가 1996년 세상을 떠난 뒤 빈 집이 되었다가 5년 전부터 후손이 일을 맡긴 관리인 부부가 살고 있다.
안동의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진 지난 4일 오전, 임청각에는 관리인 이상동씨의 부인과 시에서 나온 화재경비원밖에 없었다. 이씨의 부인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폐가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마당에 무릎까지 자란 풀이 우거져 벌레가 많아서 밤에 전등도 켤 수 없었다니까요. 지붕은 열차에서 날아온 쇳가루가 앉아서 빨갰고요. 지붕이 새서 골조만 남기고 해체 공사를 했고 기와도 싹 갈은 거예요. 수리는 매년 하고 있지요.”
1910년 8월 한일 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망하자 이듬해 1월, 53세의 석주는 친인척 50여 가구를 끌고 만주 땅 서간도로 망명한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산을 처분하고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사당의 신위까지 땅에 묻고 떠났다. 서간도에서 석주는 군사기지 건설을 위해 한인 자치조직인 경학사,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과 병영, 군정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세워 이끌었다.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는 68세 때인 1925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내각 수반)에 선출됐다. 하지만 독립투쟁 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조정하려고 애쓰다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해 이듬해 2월 만주로 돌아왔고, 1932년 길림성 서란현에서 만 74세로 순국했다.
석주 집안이 만주로 감에 따라 임청각은 오래 동안 자주 비어 있었다. 돌아온 후손도 편히 머물지 못했다. 석주의 아들 이준형은 일제의 감시와 회유를 피해 안동의 산골로 옮겼다가 일제가 거기까지 따라오자 1942년 “일제 치하에서 사는 것은 수치”라는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임청각의 수난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1950년 한국전쟁 전후로는 안동철도국 노무자 집단주택으로 사용되면서 심하게 훼손됐는데, 철도국이 영주로 옮긴 후 1975년 해체 복원됐고 몇 번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임청각 주인 석주의 유해는 만주에서 눈을 감은 지 68년 만인 1990년에야 환국했다. 해방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지만, 너무 오래 걸렸다. 일제의 호적을 거부해서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가 국적법 개정으로 국적을 회복한 것은 다시 10여년이 지난 지난해, 2009년의 일이다.
임청각 앞을 지나는 열차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경술국치가 있은 지 100년, 해방된 지 65년, 지금 우리는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친 선열들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가. 마음이 무거워진다.
안동=오미환기자 mhoh@hk.co.kr
■ 이상룡 직계 증손자 이항증
친일파 후손은 대대로 잘 살고 독립운동 가문은 3대가 망한다더니,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룡의 후손들은 가시밭길을 걸었다. 석주가 만주에서 순국하자 귀국한 아들과 손자가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임청각의 집과 대지는 다른 친족 4명의 이름으로 등기된 채 70년간 방치됐다. 석주의 아들은 자결 순국했다. 옥중 해방을 맞았던 손자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다 빨갱이로 몰렸고, 한국전쟁 중 울분과 고문 후유증으로 어린 자식들을 남긴 채 숨졌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족이 임청각을 챙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석주의 직계 증손자 이항증(71)씨는 2003년부터 임청각의 소유권을 정리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명의신탁한 4명의 후손이 68명으로 늘어나 소유권 자체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발이 닳도록 뛰어 61명에 대해서는 2003년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나머지 7명은 생사 불명, 이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서류를 송달할 수 없어 미결 상태다. 2007년 임청각을 국가에 헌납하려 했지만, 소유권이 불분명해 그마저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의 집이 광복 60년이 넘도록 소유권 정리조차 안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등기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온갖 모욕을 당했어요.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법률구조공단도 가봤지만 찬밥 신세였어요. 변호사들도 소송을 안 맡으려 하고. 일만 많고 실익은 없기 때문이죠. 2003년 재판 시작하면서 관련자 68명에게 복사해서 보낸 서류만 5만5,000장이었습니다. 안동시와 경북도가 임청각에 석주 선생 생가라는 표지판을 세운 지 10년이 넘었는데,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5월에야 임청각을 현충시설로 지정해 줬어요. 소유권자가 신청해야 한다는 이유로요. 이래서야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어요?”
크고 아름다운 집 임청각을 두고도 남의 집 처마 밑을 전전하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던 고초는, 그는 말하기 싫다고 했다. “역효과만 나지 않겠어요? 독립운동하면 저리 망한다고 할 것 아닙니까?”
이씨는 임청각 연고권자 중 미해결 7명에 대해 지난해 10월 법원에 소유권 이전 청구를 해놨다. 한일병합 100년인 올해 안에는 완결되기를 바란다. 주인 없는 집, 임청각의 오늘이 한국 현대사의 그늘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오미환기자
■ 안동은 '독립운동 성지'
안동이라면 누구나 퇴계와 유학, 전통과 보수성을 떠올린다. 그런 안동에서 요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다. 2007년 8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연 뒤, 안동 사람만이 아니라 탐방객들도 안동을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독립운동사에서 안동이 가지는 특징은 단연 두드러진다. 첫째, 안동은 독립운동의 발상지다. 독립운동의 첫 걸음인 1894년 갑오의병이 일어난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 안동은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이 가장 많다. 전국 시군 가운데 포상자 수가 300명을 넘는 유일한 곳이다. 셋째, 자결하여 순국한 인물이 가장 많은 곳도 안동이다. 무려 10명이다. 넷째, 한 지역의 독립운동으로 독립운동사 51년을 채울 수 있는 곳도 안동뿐이다.
이러한 안동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독립운동은 짧은 기간에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너지는 나라를 버텨내고, 또 무너진 나라를 되찾아 세우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에너지는 바른 정신력과 추진력으로 구성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바른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꺾이지 않고 밀고 가는 추진력도 있어야 한다. 안동에는 바로 그런 에너지가 있었다.
안동 사람들의 에너지는 두 가지 줄기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퇴계 학맥이라는 씨줄이다. 노론 세력에 가로막혀 200년 넘게 중앙 진출이 막힌 동안, 퇴계 학맥 계승자들은 학문에 몰두하면서 명분과 의리 정신을 강하게 다졌다. 지도자가 방향을 가리키자, 무너지는 나라를 지탱하는 데 거의 모두가 나섰고, 또 이어갔다.
다른 하나는 혼반(婚班)이라는 날줄이다. 안동문화권 사람들은 한두 가지 촌수로 서로를 헤아리지 않는다. 친가ㆍ외가ㆍ진외가ㆍ외외가ㆍ증외가 등 다중적이고 중첩적인 촌수를 확인한다. 그 연결성과 결속력은 의병이나 계몽운동에서, 만주 망명과 독립군 기지 건설에서, 또 사회운동이나 6ㆍ10만세운동에서도 역동적으로 작용했다.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진 그물, 이것이 안동문화권 에너지의 모양새다. 그물은 한 끝만 잡아당기면 전체가 달려 나온다. 문제는 지도자의 뜻과 지도력이다. 빼어난 칼솜씨도 뜻에 따라 뛰어난 요리사도 되고 조폭도 되듯이 말이다. 안동의 지도자는 강한 의리정신을 몸으로 실천했고, 이를 따른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은 방향성과 지속성에서 빼어났다. 의병이나 계몽운동, 혹은 3ㆍ1운동 가운데 어느 한 가지 기념사업에만 매달리는 지역과는 다르게, 안동은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자랑할 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골골마다 독립운동 이야기가 넘쳐나는 것이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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