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간의 미스터리가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단지 조선인으로 여겨질 뿐 누군지 알 수 없어 일본 동남부의 한 사찰에 방치돼온 131위 유골의 신원이 밝혀진 것이다. 1945년 해방 직후 돛단배에 의지해 귀향하다 행방불명된 일제 강제징용 조선인들이다.
국무총리실 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일본 사이타마(埼玉)현에 위치한 사찰 곤조인(金承院)에 안치된 조선인 유골 131위의 상당수는 히로시마 미쓰비시 징용공들"이라고 5일 밝혔다.
일제시대 히로시마 (廣島)에 위치한 전범기업 미쓰비시(三菱) 공장에서 일해온 조선인 징용노동자 수백명이 원자폭탄의 재앙 속에 간신히 살아남아 해방과 함께 민간 기범선(동력기관과 돛을 함께 갖춘 작은 배)을 타고 귀국하다 행방이 묘연해져 그간 '히로시마 미쓰비시 징용공 실종사건'으로 불려왔다. 여러 추정이 난무했지만 시신 등 사건의 실체는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2005년 이 사건 조사에 착수한 진상규명위는 항로 등 배의 출항기록과 당시 기상상태, 목격자 증언 등 5년간의 조사를 통해 미쓰비시 징용공 실종사건의 윤곽과 유골을 찾아냈다. 진상규명위 조사에 따르면 1945년 9월17일 미쓰비시 공장 조선인징용자 246명을 태우고 일본 도바타항을 출항한 배는 부산으로 향하던 중 대한해협에서 마침 북상하던 태풍을 만나 침몰했다. 조선인 징용자들은 태풍 속에 표류하다 대마도와 인근 이끼(壹岐)섬까지 떠내려간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시신을 목격했던 대마도 주민들은 진상규명위 조사관에게 "댕기머리를 하고 색동저고리를 입은 시신 수 십여구가 해변으로 밀려왔다"고 말했다. 시신들이 확실한 조선인임을 확인하는 증언이다. 규명위 관계자는 "출항기록을 보면 수백여명을 태우고 당시 이 지역을 지나던 배는 미쓰비시 징용공들이 탄 배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 사건은 조선인 징용자를 관리하던 미쓰비시 감독관 후카가와 무네토시(深川宗俊)씨의 노력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됐다. 징용공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은 그는 회사에 알렸지만 미쓰비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마음의 부담을 가졌던 그는 1973년 직접 실종자들의 행방을 찾아 나섰고 1976년 대마도 인근 이키섬 해안가에 조선인 시신이 매장된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유족과 시민단체가 나서면서 1983년 일본정부의 실태조사가 이루어져 이키 섬에 이어 대마도에서도 매장된 조선인 시신 45구를 확인했다. 하지만 일본당국은 미쓰비시 징용공과의 상관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두 섬의 유골 131위는 결국 1992년과 2003년 일본 본토의 사찰로 옮겨져 신원을 알 수 없는 조선인이란 이름으로 보관돼 왔다.
진상규명위 오일환 전문위원은 "귀환 중 희생된 조선인징용자의 피해사례를 정부가 직접 조사해 밝혀낸 것은 처음"이라며 "해당 유골을 강제동원 도중 숨진 다른 조선인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하는 방안을 일본 정부와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태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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