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기디 질긴 고무를 씹는 것과 같았다."
화가 황재형(58)씨는 광부로 일했던 시간을 이렇게 돌이켰다. 민중미술 작가로 활동하다 1983년 돌연 강원 태백으로 이주한 그는 줄곧 그곳에서 탄광촌의 삶과 풍경을 화폭에 담아왔다. 그의 광부 생활은 3년 만에 끝났다. 석탄가루 때문에 시력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신 탄광촌의 아이들, 교사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그들 속에서 살았다. 재료를 살 돈도 없었기에 주위의 흙이나 석탄가루를 물감에 섞어 그림을 그렸다.
2007년 16년 만에 전시를 열며 다시 존재를 알렸던 그가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 '쥘 흙과 뉠 땅'을 열고 있다. 그의 전시 제목은 1984년 첫 개인전 이후 늘 같다. 쥘 흙은 있어도 몸을 누일 땅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붓 대신 나이프를 사용해 몇 년 동안 덧칠해가며 완성한 그의 그림들은 일견 음울하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슬레이트 지붕 위에 내린 노을 한 자락, 어두운 마당 한 켠에 파랗게 솟아난 파, 계단 옆에 핀 노란 꽃 등 서정적이고 따스한 요소들도 눈에 띈다. 불 켜진 작은 시골집을 그린 '어머님 전상서'에서는 어머니를 찾아와서도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하는 아들의 눈물 고인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어두운 막장에서 밥 한 숟가락 입에 넣는 광부, 탄광에서 남편을 잃은 뒤 석탄을 선별하는 일로 먹고사는 선탄부 여인의 검은 얼굴도 전시장에 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멀리서 바라본 산과 마을의 풍경들이 훨씬 많다. 탄광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떠나고 탄광촌의 풍경이 달라지면서 작가가 바라보는 대상의 폭도 좀 더 넓어진 듯하다.
황씨는 "예전에는 의무감처럼 그렸는데 요즘은 편안해졌다. 억지스러움이 사라진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어느날 밤 눈보라가 치는 풍경을 보고 너무 좋아서 다음날 아침에 그림을 그리러 가보니 어제 본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군요. 드러나는 건 순간이고 모든 건 내재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 광부들이 쓰다 버린 나무 슬리퍼도 사사로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아 기쁘게 그립니다."
그의 말마따나 "오래된 탄광촌 사택들을 깡그리 뭉개버리고 모델하우스를 지어 관광객을 맞는" 현실에서 '탄광촌 화가'는 앞으로 무엇을 그려야 할까. 그는 "내가 그리는 것은 탄광촌이라는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쥘 흙과 뉠 땅'이라는 주제다. 요즘 보면 서울이 더 탄광 같고, 갈 곳을 잃은 도시 사람들이 더 광부 같다. 그들에게 위안과 격려가 되는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28일까지. (02)720-1020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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