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낙태(落胎)를 할까. 우문현답 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원치 않는 임신 때문이다. 과거에는 쾌락주의에 물든 여성들이 시도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국가나 남편에 의해 행해졌다. 초기 로마시대의 낙태는 유산 상속인의 숫자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에 대해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남편이 낙태를 결정했다. 고대 중국과 이집트, 그리스에서도 낙태는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가난 등 경제적 요인이 컸고, 튼튼한 아이를 얻으려는 우생학적 이유도 가세했다. 피임법이 없던 시절, 낙태는 사실상 가족계획의 일환이었다.
▦ 낙태 문제에 국가가 다시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다. 일본은 1880년 낙태 처벌 조항을 형법에 처음 도입했다. 인구가 국력의 중요한 기준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군인과 납세자의 머릿수를 늘려야 했던 군국주의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낙태를 철저히 금지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부담으로 작용하자 낙태 허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리나라도 인구 억제를 위해 1973년 강간ㆍ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등 5가지 예외 조항을 모자(母子)보건법에 넣으면서 사실상 낙태를 묵인하기 시작했다.
▦ 해묵은 낙태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은 저출산 탓이다. 정부는 낙태 근절을 저출산 대책에 넣고 싶어하는 눈치지만, 여성계의 반발이 크다. 근 반세기 동안 미혼모 대책 등 낙태 예방에 손을 놓고 있던 정부가, 뒤늦게 여성의 애 낳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항변이다. 이른바 '여성의 신체적 자기 결정권'이다. 과중한 보육 및 사교육비 부담도 낙태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면 어머니의 스트레스 호르몬 때문에 공격적이고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의학적 보고도 낙태 허용론의 근거로 인용된다.
▦ "지금까지 분만한 아기보다 낙태한 아기가 더 많다." 한 산부인과 의사의 고백이다. 여성계의 주장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우리의 낙태 현실은 너무 심각하다. 2005년 정부 조사에서 한 해 34만건, 97년 갤럽 조사에선 연간 150만건의 낙태가 이뤄지는 것으로 집계됐다(연간 신생아 43만명). 세계 최고 수준이다. 낙태 시술자의 절반은 청소년과 미혼 여성이고, 96%가 불법 시술이다. 무의미한 논쟁에 매달리기보다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게 옳다. 학교에서 피임 도구를 나눠주고 혼전 순결서약 캠페인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산부인과 경영난을 해소할 수 있는 대책도 필요하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