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문명으로 이름난 남아메리카의 페루는 '태양의 나라'다. 2월 기온이 20도를 훨씬 웃돈다. 연중 최저기온이라고 해 봤자 10도 이상이다. 눈은 5,000m 이상 고지대의 만년설로만 접할 수 있는 환경.
동계올림픽과는 도무지 접점을 찾기 힘든 페루가 이번 밴쿠버동계올림픽(12~28일ㆍ현지시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출전 선수를 배출했다. 주인공은 남자 크로스컨트리 스키의 로베르토 카르첼렌(40). 스키라면 딴 세상 얘기로만 알던 카르첼렌이 어떻게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인연을 맺게 됐을까. 연결고리는 미국 시애틀에 사는 한 여성과의 온라인 채팅이었다.
채팅창에서 첫인사를 나눈 게 벌써 7년 전. 카르첼렌과 미국인 여성은 5개월간 많게는 하루 5시간 동안 노트북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책도 같고, 각자의 가족에 대한 생각도 같았고, '꿈에는 한계가 없다'는 신념도 신기하리만치 일치했다. 서로를 천생연분이라 여긴 둘은 리마(페루 수도)와 시애틀간 거리인 8,000㎞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둘은 현재 시애틀에 살고 있다. "우리처럼 채팅에 매달리다 보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카르첼렌. 이에 카르첼렌이라는 새로운 성(姓)으로 살아가는 케이트는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라며 부창부수를 자랑했다.
둘의 첫 오프라인 만남은 2003년 3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이뤄졌다.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3개월간 케이트와 꿈 같은 시간을 보낸 뒤 리마로 돌아온 카르첼렌은 가족들 앞에서 결혼을 '선언'했고, 당장 시애틀로 찾아가 그 해 7월 웨딩마치를 울렸다.
신혼생활은 깨소금이 쏟아졌지만, 마라톤을 제외하면 서핑이 취미의 전부이던 카르첼렌에게 시애틀의 바다는 너무 차가웠다. 남편을 안쓰럽게 여긴 케이트가 스키를 소개시켜 준 때가 2005년. 생전 처음 타보는 스키는 베일에 싸였던 카르첼렌의 재능을 일깨웠다. 날로 늘어가는 스키 실력은 동네방네 화제가 될 정도였다. 카르첼렌에게 스키는 언 바다에서 즐기는 서핑과도 같았다.
실력이 수준 이상으로 오르자 새 목표가 생겼다.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을 TV로 지켜보면서 국가대표의 꿈을 품은 것. 그러나 개척자로서 어려움은 꿈보다 컸다. 지금까지 훈련비로 쓴 돈만도 7,000만원. 각각 여행사 사장(카르첼렌), 마이크로소프트 매니저(케이트)로 일하는 부부에게도 부담스러운 돈이었다.
마라톤 경험을 앞세워 '설원의 마라톤'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선택했지만, 후회막심인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경쟁 종목으로서의 스키는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페루인들은 삶에 대한 접근법 자체가 달라요. 맛있는 요리와 와인, 그리고 파티를 즐기죠. 크로스컨트리 스키요? 처음엔 죽을 맛이었어요."
카르첼렌은 15㎞ 프리스타일 올림픽 출전권을 따기 위해 전세계를 돌던 중 모친의 간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이때가 지난해 12월 초.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이틀 뒤 캐나다대회에 나선 카르첼렌은 마침내 밴쿠버동계올림픽 출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카르첼렌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페루로 날아갔고, 여윌 대로 여윈 어머니는 아들이 전한 경사에 오랜만에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올림픽 목표는 꼴찌 면하기. 그래도 12일 열릴 개막식에서 카르첼렌은 혼자가 아니다. 새 세상을 가르쳐준 아내, '아빠' 소리가 입에 붙은 두 살배기 딸과 함께 페루 동계올림픽사의 첫걸음을 뗀다. 고국에서 TV로 지켜볼 병상의 어머니와도 함께.
양준호 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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