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 모델라인 대표는 패션계에서 입바른 소리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지난 주 한 저녁모임에서 만난 그는 "명품 병을 키운 건 순전히 매스컴 잘못"이라며 열을 올렸다. 세상 어디를 가 봐도 수입브랜드에 '명품'이라는 극찬을 붙이는 곳은 한국 밖에 없고, 매스컴이 아무런 성찰 없이 이 용어를 씀으로써 소비자에게 고가 수입품에 대한 선망과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패션유통시장에서 수입품에 명품이라는 아우라를 선사한 건 갤러리아백화점이었다. 1990년 9월 패션전문점 파르코를 재개장하면서 명품관이라는 호칭을 썼다.
현 갤러리아 명품관 이스트(East)인 이곳에는 개장 당시만 해도 샤넬 루이비통 등 수입브랜드는 물론 미스지컬렉션 장광효카루소 등 국내브랜드와 이영희한복 등 전통의상이 함께 자리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세계화와 시장개방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고가 수입브랜드들의 국내 진출이 가속화했고 갤러리아 명품관 이스트에 있던 한국 브랜드들은 하나 둘 퇴출됐다.
명품(名品)의 사전적 정의는 '뛰어나거나 이름 난 물건이나 작품'이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고가 수입브랜드'를 의미하는 용어가 됐다.
무엇이 명품인가를 정의하는 건 간단하지 않다. 100년 전후의 브랜드 역사,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한 품질, 희소성 등이 일반적인 정의이지만 글로벌시장을 겨냥해 자동화 생산이 일반화된 시대에 이를 만족시키는 브랜드는 열 손가락을 꼽기 힘들만큼 적다.
명품 소비가 자긍심의 문제라면 해당 브랜드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살펴야 할텐데 한국시장에서 돈 벌면서 사회적 기여를 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는 데는 대부분 무심하다.
에르메스가 미술상을 제정했을 뿐 샤넬은 일본 도쿄에는 플래그십 점포를 세워도 국내에는 가두점 하나 열지 않았다. 백화점들이 인테리어 비용까지 대주며 서로 매장을 유치하려고 혈안인데 굳이 부동산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는 셈이다.
한국보다 훨씬 명품병이 심했던 일본에서도 수입브랜드를 명품에 준하는 특별용어로 우대하지는 않는다. 럭셔리(luxuryㆍ호사품)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백화점들이 매달 내놓는 판매동향에 명품은 단독 카테고리로 등장한다.
여성복이든 남성복이든 화장품이든 품목과 상관없이 고가 수입브랜드는 다 명품에 속한다. 정부가 발표하는 유통업체 매출동향 보고서에도 명품은 따로 집계된다. 유통업체들의 매출 자료를 그대로 받아 작성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소위 명품에 속하는 브랜드들이다. 유통공룡으로 불리는 한 유명 백화점의 명품 리스트를 보면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등 누구나 수긍할만한 브랜드가 있는가 하면 한 켤레에 5, 6만원 짜리 수입 스타킹업체도 버젓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명품쌀, 명품펀드, 명품몸매까지 나오는 세상에 명품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건 좀 촌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 발표에서도 '명품= 고급 수입품'이라는 암시가 공공연히 이뤄지는 건 국내 패션산업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굳이 이재연 대표의 열변이 아니더라도 수입브랜드에 명품 칭호를 붙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지만 다시 한번 일상에 스며든 과잉호칭의 폐해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