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올 들어 부쩍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민생활 향상 다짐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에는 '강냉이 밥' 편이다. "아직 우리 인민들이 강냉이 밥을 먹고 있는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우리 인민들에게 흰 쌀밥을 먹이고 밀가루로 만든 빵이랑 칼제비국(칼국수)을 마음껏 먹게 하는 것이다."
북의 '흰 쌀밥에 고깃국' 타령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1일자가 전한 김 위원장의 절절한 인민 생활 걱정에 북한주민들은 크게 감격했을 법도 하다. 노동신문은 지난달 9일 같은 난에 수령(김일성)의 유훈인 '흰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을 관철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김 위원장의 심정을 소개했다.
김 위원장의 다짐은 당장 먹고 살기 힘든 북한주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겠지만 문제는 실천 가능성이다. 흰 쌀밥과 고깃국, 비단옷과 기와집, 밀가루빵과 칼제비국에 대한 기대를 높여놓고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은 올해 신년 공동사설의 핵심 구호이기도 한 '인민생활의 결정적 전환'을 이룰 자신이 있는 것일까.
북한의 실상은 훨씬 어려워 보인다. 북한은 최근 '고작 농부의 지게에 올려 놓을 강냉이 얼마'라고 타박하던 남측의 옥수수 1만 톤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강냉이 밥조차 충분히 못 먹는다는 뜻이니 강냉이 밥 먹는 것에 가슴 아파할 처지가 아니다. 지난해 11월 단행한 화폐개혁의 부작용도 심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가가 급등하면서 식량 구하기가 한층 어려워져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고, 주민들의 항의와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경공업과 농업을 주공전선으로 설정하고 전 국가적 전 당적 힘을 총동원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빈곤의 함정에 빠진 북한이 내부 역량만으로 식량과 생필품의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기는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다. 지난해 '150일 전투' 와 '100일 전투' 를 통해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지만 인민 노력동원 방식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결국 외부의 지원에 기댈 수밖에 없다. 올해 신년공동사설이 과거처럼 자력갱생을 앞세우지 않고 대외시장 확대와 대외무역활동의 적극화 등을 강조한 것은 북측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심 기대하고 있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우선 중국과 남한의 지원이다.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는 지난해 북한을 방문, 막대한 투자와 지원을 약속했다. 금강산과 개성관광이 재개되고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이 인상되면 남측에서 벌어들이는 달러도 상당할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올해 국방위원회 결정으로 '국가개발은행'을 설립하고 유럽 등지에서 공격적으로 투자 유치에 나선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외부 지원이 핵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 가능할까. 지난해 말 평양을 다녀온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미국의 한 TV시사토크 프로그램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미친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런 김 위원장이라면 핵을 포기하지 않고 국제사회에서 대규모로 투자 유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북한의 핵 보유보다 김정일 체제 붕괴를 더 두려워한다는 중국도 혼자 북한체제를 떠받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너지지 않고 그럭저럭 버티게 할 수는 있지만 고깃국에 흰 쌀밥, 밀가루 빵이랑 칼제비국을 맘껏 먹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김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이 멀지 않았다고 믿을 근거는 충분하다.
길들이기에만 주력하면 곤란
그럼 이 순간에 우리 정부가 할 일은 무엇인가. 연내 남북정상회담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하면서 원칙 없는 만남은 안 된다고 압박하는 것은 김 위원장의 약점을 읽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참에 길들이겠다고 마냥 밀어붙이는 것은 현명하다고 볼 수 없다.
당장은 다급해서 매달리지만 외부 지원과 투자 유치를 위한 국제적 환경 조성노력이 벽에 부딪히면 북한은 언제든지 '수정안'을 거둬들이고 '원안'으로 돌아갈 소지가 있다. 흐름을 정확히 읽고 민첩하게 대처하는 유연성이 필요한 때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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