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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일꾼' 외국인 이웃사촌] (4) 보육원생 돕는 현대중공업 외국 파견사 직원 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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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일꾼' 외국인 이웃사촌] (4) 보육원생 돕는 현대중공업 외국 파견사 직원 부인들

입력
2010.02.03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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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여년 이어온 온정… "스쳐가는 이방인 아닌 공동체 한식구"

지난달 28일 오후 2시 15분께 울산 동구 서부동 현대중공업 외국인사택 내 클럽 하우스. KBS2TV 인기 토크 프로그램인 '미녀들의 수다' 촬영장을 연상케 하듯 미국 캐나다 인도 노르웨이 대만 등 세계 각국의 40, 50대 아줌마 20명이 식당 조리실로 모여들었다.

이날의 모임의 정식 명칭은 '오스트레일리언 베이킹 클래스(Australian Baking Classㆍ오스트레일리아식 빵 굽기 강좌)'.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돌로레스 칼라이스(49)씨가 국적이 제각각인 이웃 주부들에게 자신의 할머니가 즐겨 만들었던 바나나 케이크와 쿼시(파이의 일종)를 직접 만들어 보이고 요리 비법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요리 강좌에 참석한 20명은 세계 최대 조선소 현대중공업에 선박을 주문해 놓고 규정에 맞게 건조되는지를 현장에서 살피는 외국 선주 회사와 선급(배의 등급을 매기는 것) 회사 관계자 및 감독관의 부인들이다. 이날 모임은 총 289세대가 사는 이 사택의 글로벌 주민 가운데 고아원후원회(Orphanage Committee) 회원만 따로 모여 세계 각국의 음식을 음미해 보고 해당 국가의 먹거리 문화를 익히는 날이다.

행사에 참가한 노르웨이 출신 칼리 리아난(41)씨는 "서양의 대부분 나라에서 만들고 있는 빵과 쿠키지만 만드는 방식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네요. 돌로레스가 가진 비법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고,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 있어 행복했어요"라고 말했다.

매달 2, 3회 열리는 이 요리 강좌에는 독특한 규칙이 있다. 각 나라 주부가 직접 무료 일일 요리사로 나서고 시장에서 싼값으로 재료를 준비해 조리 비용도 별로 들지 않을 텐데 1인당 1만원의 참가비를 꼭 내야 한다. 비용 제하고 남은 돈은 고아원 후원 기금으로 적립된다. 20명이 참가, 총 20만원의 참가비가 걷힌 이날 요리 강좌에선 재료비 1만9,000원을 뺀 18만1,000원이 기금으로 모아졌다.

이들이 기금을 만드는 방법은 이뿐 아니다. 개인의 자발적 기부는 당연하고, 바자회와 클럽 하우스 동전 모금함도 있다. 또 빙고 게임 모임을 통해서는 1인당 1만원의 참가비를 걷어 행사 당일 경비를 제외한 돈을 기금으로 돌리고, 봄과 가을 주부들이 세계 각국 요리로 여는 가든 파티를 통해서는 판매 수익금이 기금으로 모아진다.

이렇게 지난 한 해 동안 모아진 기금이 총 493만여원이나 된다. 주재국의 소외 이웃을 돕자는 뜻이 하나가 된 값진 돈이다.

캐나다 출신 회원 마틴 로얄(51)씨는 "다양한 나라 문화를 접할 수 있어 후원회 행사는 거의 참석한다"며 "친구를 사귀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지만 무엇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울산의 일원으로서 이 지역에 기여할 통로를 갖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모인 기금은 매년 어린이날 지역 보육원생 100여명이 경북 경주시 등 인근 관광지의 대형 놀이 공원에서 하루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비용과, 연말 외국인 사택으로 원생들을 초청해 성대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푸짐한 선물을 돌리는 데 이용된다. 지난해 12월 12일 22년째 열린 원생 초청 크리스마스 파티에는 총 120여명의 원생들에게 돌린 선물 구입비로만 300여만원을 썼다.

선물을 고르는 방법도 지혜롭다. 사전에 초청할 원생들에게 자신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품목을 쪽지에 적게 하고 사택 클럽 하우스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쪽지를 별 모양으로 주렁주렁 건 뒤 사택 주민들이 지나가다 무작위로 하나씩 뽑아 그들의 소망을 해결해 주는 식이다.

고아원후원회가 현대중공업 외국인 주부들의 연중 십시일반 기부 모임이라면 단 하루 행사로 1,000만원의 기부금을 만들어 내는 사내 외국인 축제도 있다. 매년 12월 하룻밤을 잡아 울산 현대호텔에서 열리는 스코틀랜드 전통 축제 세인트 앤드루즈 볼(Saint Andrews Ball)이 그것. 지난해엔 12월 5일 열렸다.

세인트 앤드루즈 볼은 스코틀랜드 수호성인을 기념하는 축제이나 요즘엔 일반적인 연말 송년 파티를 의미한다. 현대중공업에 초창기 파견된 스코틀랜드 출신 엔지니어 몇 명이 자국으로부터 위스키와 소시지를 공수해 와 사택 클럽 하우스에서 백 파이프 공연 등으로 송년회를 치르고 남은 수익금을 기부하던 것이 해가 가면서 행사가 커져 2008년부터는 호텔 메인 이벤트홀을 빌릴 정도로 인기가 폭발적이다.

이 행사는 장당 10만원의 기부금 티켓과 1만원짜리 경품 티켓을 따로 구입해 입장해야 하는 등 참가 부담이 만만치 않은데도 매년 외국인 직원과 가족 등 1,000여명이 참석, 성황을 이루고 있다. 지난 연말도 기부금으로 1,000만원을 모아 등록금을 못 내는 동구 대학생 등을 위한 장학금으로 전액 기부했다.

지난해 이 행사를 개최한 제임스 맥알룬(31ㆍ영국)씨는 "이국땅에서 향수를 달래는 모임으로 시작된 송년 축제가 이젠 현지 소외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 축제로 바뀌었다"며 "현대중공업이 사내 외국인들을 위해 배려를 아끼지 않는 만큼 우리도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울산= 목상균기자 sgmok@hk.co.kr

■ 고아원후원회장 바이올렛 우씨

"외국에 살면서 또 다른 외국인들과 작은 정성을 모아 주재국 어린이들을 위해 이런 아름다운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들 행복해 합니다."

고아원후원회장인 바이올렛 우(42ㆍ여)씨는 "대만에선 학원을 운영해 봤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간호사로 활동했었지만 이런 기회는 갖지 못했어요. 파티를 열고, 음식을 만들며, 빙고 게임을 즐기면서도 어린이를 도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라며 연방 '원더풀' '베리 해피'를 쏟아 냈다.

대만 카오슝(高雄)이 고향인 우 회장은 남편인 선박감독관 헨닝 자콥슨(48ㆍ덴마크)씨를 따라 2005년 12월 현대중공업에 온 뒤 외국인사택에 계속 거주해 와 이곳 아줌마들 가운데서는 제법 고참이다.

남편 자콥슨씨는 선박 관련 업무로 현재 독일에서 근무 중이고, 외동딸(16)은 대만 현지에서 모델 등 연예인으로 활동해 가족 없이 사택에서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지내는 우씨는 김치와 삼계탕을 즐기는 것이 여느 한국 아줌마와 다름없다.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살거나 연예인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모국 대만에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기자의 의문에 그는 "한국, 특히 이 현대중공업 외국인사택이 너무 살기 좋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넓은 부지에 정원이 잘 갖춰진 집과 각종 부대 시설, 밤 나들이가 두렵지 않은 치안, 외국인들에 대한 한국인의 친절, 한류로 일컬어지는 높아진 문화 수준 등으로 남편과 딸도 자신이 한국에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우씨는 "한번 남편과 싱가포르공항에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그는 굳이 비빔밥과 한국산 맥주를 시키더군요. 저보다 한국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며 한바탕 웃었다.

국가와 문화, 성장 환경 등 모두가 제각각인 회원들이 후원회 활동에 박자가 잘 맞는 이유가 궁금했다. 우씨는 "글쎄요. 짧게는 수개월, 길어야 수년의 체류 기간인데 참 신기하죠. 20년이 넘는 전통을 갖고 있는 고아원후원회는 사택 내 다양한 모임 가운데 가장 부러움을 사고 있는 모임입니다. 특히 기부라는 의미를 다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고객과 가족에 대한 현대중공업의 배려도 이유로 꼽았다. 우씨는 "회사는 외국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아이들의 교육에서부터 주택, 각종 행사 지원, 출입국 관리 등 전 부문을 챙겨 주며 한국 생활에서 빨리 적응을 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한국 주민으로서 사는 방법 말이죠. 사택 내 가장 인기 있는 모임 중 하나가 한국어교실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잠시 스쳐가는 나라가 아닌 한국 주민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당연 봉사도 주민 생활의 일부죠"라고 말했다.

울산= 목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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