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소녀 피엘 위들린(14)은 차디찬 은색 부검용 침상에 누웠다. 그는 유령처럼 병원에 왔다. "지진이 났을 때 집에서 다쳤다"고만 했다. 죽은 자는 혼이 떠났고, 살아남은 자는 넋이 나간 폐허의 현장에서 소녀는 말을 잃었다.
부모의 안부를 물어도 입을 꼭 다문 채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양손 곳곳은 살점이 심하게 패여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6곳의 상처 크기는 족히 2~3㎝ 정도 됐다. 소녀는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손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속삭이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이곳에 왔어요."
임신 6개월째인 주부도 부검용 침상에 누웠다. 남편을 비롯해 일가족 6명을 잃었다. 차로 2시간이나 걸리는 산길을 헤치고 부러진 팔을 고치러 왔다. 6명을 떠나 보냈지만 자신이 살아야 뱃속의 아이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찾은 곳은 바로 한국 의료진이 2일 오전 11시(한국시간 3일 오후 1시) 대지진참사를 겪은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북서쪽(델마스거리) 델라빠스대학병원에 문을 연 병원 속 병원이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적십자사, 가톨릭중앙의료원 등이 더불어 꾸린 의료구호팀 1진(15명)이 진료에 참여하고 있다. 쿠바와 스페인, 콜롬비아 등지의 의료팀도 각자 진료실을 운영하고 있다. 치료를 기다리는 줄은 50m나 늘어서 있었다.
예상대로 열악했다. 전기는 끊기고 치료공간은 부족했다.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X-레이 촬영이 필요한 환자들은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압권은 부검용 침상이다. 환자를 누일 침대가 부족해 시신을 부검하던 철제 침상을 빌려다 진료 및 치료용 탁자로 쓰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그 위에 누워 상처를 치료하고 흡족한 듯 돌아갔다. 죽음을 증언하던 자리가 삶을 연장하는 공간이 된 건 아이티의 역설이다.
아이티는 현재 기온이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건기(乾期)다. 상처를 방치하면 금방 곪고 썩어 들어간다. 그런데도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심드렁했다. 대재앙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인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된다고 믿는 것인지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다. 다만 치료를 받을 수 없으면 유일하게 남은 선택권이 참는 것이란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의 의사들이 더 걱정을 했다. 가톨릭중앙의료원 정형외과 박수안 교수는 "(한 여성은) 겉으로 멀쩡해 보이고 고통도 호소하지 않았는데 뼈가 어긋난 지 보름이 지났더라"며 "시간이 너무 흘러 뼈를 제자리로 돌릴 수 없었다"고 했다. 지진으로 인해 뼈가 어긋나고 부러지거나 살이 썩어 들어가는 환자들은 참사 후 3주가 지나도록 병원을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의료진의 사명은 더 막중해졌다. 주민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현지인 통역을 고용하고, 진료 외에도 도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지역상황을 면밀하게 살펴 장기적인 관점에서 진료를 유지해가자는 취지다. 전기가 끊긴 현재 상황에선 수술이 불가능하고, 설령 한다 해도 기나긴 시간이 필요한 수술 이후의 안정을 장담할 수 없다.
한국 의료진의 김성근 단장은 "의료지원 활동이 단기간에 끝나면 치료가 제대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에 3월 중순까지 지속적으로 의료진을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병원 주위는 차츰 일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청바지나 가방 과일 등을 파는 시장이 열리고, 의료진에게 사탕수수를 팔려는 아낙들로 붐볐다. 젊은이들은 행여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외국에서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적어주기도 했다. 델라빠스(DEL LA PAIXㆍ평화)라는 이름처럼 차츰 평화가 깃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시 올지도 모를 지진이 두려워 병원 마당에 텐트를 친 100여명의 피난민이 존재하고, 구호물품을 통째로 뺏는 갱들이 활개친다는 흉흉한 소문도 들린다. 병원 앞엔 산탄총을 든 경비원도 있다. 아직 희망을 말하기엔 이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포르토프랭스(아이티)=김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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