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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0년을 말한다] <2> 4·19, 혁명으로의 진화-문학평론가 김병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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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0년을 말한다] <2> 4·19, 혁명으로의 진화-문학평론가 김병익

입력
2010.02.03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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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50년 전의 그날, 4월 19일 오전의 나는 동숭동 캠퍼스의 벤치에 막막한 기분에 젖어 혼자 멍하고 앉아 있었다. 방금 많은 학우들이 교문 밖으로 구호를 외치며 뛰쳐나가 교정은 거의 텅 빈 것 같았다. 내가 민주주의며 정의와 자유를 생각하면서도 시위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한 장면을 되씹고 있었다.

돈암동에서 대학로 가는 버스를 타고 혜화동에 이르렀을 때 한떼의 고등학생들이 한 바탕 놀이판에서 놀고 돌아오는 듯한 흥겨운 기분에 젖어 거리에서 낄낄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자못 마땅치 않았다. 나라와 역사를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부정을 규탄하고 있다면 저렇게 장난치듯 해서는 안 된다, 참된 역사는 진지한 태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저렇게 우스꽝스런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안 된다를 거푸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 심신의 피로로 한숨 쉰 후의 그날 저녁 중고교 동창인 서울대 사대생 손중근군이 효자동 앞길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는 뉴스를 들었다.

내가 좀더 성숙해지고 힘든 사회 생활을 겪으면서 역사의 진행에 대한 실제를 좀 알고 나서야 나는 그날의 내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가를 깨달았다. 치열한 역사는 웅장한 팡파레를 울리며 찬연한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누구의 말마따나, 희극적인 얼굴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짓궂은 꼴로 일을 벌이고서야 근엄한 현실의 무거운 물길을 엄청난 힘으로 전복시킬 힘으로 충만해질 것이었다. 몇 명에 불과했던 바스티유의 죄수 때문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이나 철망을 넘는 월경민들의 떼가 몰고 온 동서독의 통일처럼 그 시작은 오히려 사소하거나 우발적이지만 그 의미와 결과는 참으로 창대해진다.

나는 우연의 얼굴 속에 필연의 역동성이 숨어 있듯이 그 우스꽝스런 얼굴에 역사의 운명을 바꾸는 엄청난 힘이 잠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존의 무겁고 엄숙한 세계에 대항하여 그것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가볍고 장난스러운 것이어야 할 것도 사실이다. 마산의 이름없는 한 청년의 어이없는 죽음에서 점화된 4ㆍ19가 마침내 10년 전의 6ㆍ25와 50년대 전후 체제를 청산하고, 반 세대 전의 광복이 채택한 민주주의의 수용을 위해 진통하며, 50년 전 상실한 주권의 식민체제 극복을 향한 역사적 실천으로 기폭하여 역동적인 현대 한국사의 기점을 이룩한 것도 아주 사소해보이던 그 역사의 표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4ㆍ19의 이러한 정치사적 의미가 그 후의 민주화를 향한 정치의 역사에서 퇴행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시선을 문화 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한글 세대의 등장이란 또 다른 귀중한 사태가 있었다. 4ㆍ19 세대의 가장 큰 행운은 그들이 우리 문화사에서 한글을 배워 공부하기 시작한 첫 세대로서 생래의 언어로 사유하며 모국어로 글을 쓰게 된 첫 연령 집단이란 점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이 되었고 그래서 일본어를 모르고 한자를 배우지 않은 채 순전히 엄마의 말로 말하고 한글로 글을 읽고 우리의 말과 글로 앎과 느낌을 표현한 첫 학년이었다. 이른바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가 일치함으로써 한민족 문화사에서 언어와 문자, 사유와 표현이 일치될 수 있는 첫 모국어 세대가 된 것이다.

그것은 한자문화의 보수적인 할아버지대의 세계관과 달랐고 일본말로 지식을 익힌 식민지 시대의 아버지 세대가 지닌 콤플렉스로 괴로워할 것도 아니었다. 60년대 이후의 정신사적 지형은 여기서 작도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진보적이었고 진취적이었으며 솔직했고 늠름했다. 나 스스로 인정했듯 이 세대가 분단과 반공주의 교육 때문에 이념적 우파로부터 쉽게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근대주의와 휴머니즘을 받아들이며 현대의 과학과 기술을 배우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합리주의 정신으로 미래와 세계를 향한 열린 전망을 키울 수 있었다.

60년대 중반의 문학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감수성의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이 한글 세대의 부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문학과 전후 문학에서 새로운 모더니즘적 문체를 개발했고 해방 세대가 일군 한국학의 사조에 그 실질적 내용을 충전, 발전시켰으며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서 일본의 통로를 벗어나 세계와 맞대면하며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하여 공부했고 서구의 문물을 한국에 옮겨 익히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한국의 정신적 지적 근대화로의 발진이었다.

이 정체성의 확보는 4ㆍ19가 일구어준 역사에의 주체성 획득으로 연동되었다. 밑으로부터의 봉기로써 막강한 정권의 전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선택에의 의지와 실천적 자신감이 솟아났고 여기서 현실과 역사에 대한 전래의 운명적 수락은 변혁에의 능동적 도전으로 바뀌고 미래와 세계를 향한 기획과 개척을 도모할 자기 신뢰를 키워 올릴 수 있었다. 지난 반 세기 동안의 우리 눈부신 현대사의 역동성은 여기서 그 정신적인 기반이 조성되었으리라.

이런 뚜렷한 변화를 체감하면서도 독재와 유신의 고통스런 세월을 견뎌야 했던 나는 어느 새벽 유신 정권의 총수가 시해되었다는 뜻밖의 뉴스를 들었다. 그날 나는 4ㆍ19의 이념이었던 민주주의와 자유를 억압하면서 경제 우선주의로 사회적 모순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적대시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언젠가는 재평가될 것이라는 확신이 스며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 이처럼 기특한 인식에 이르렀는지 신기하지만 세상살이에 더 많은 눈을 뜨면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는 경제적 부와 사회적 중산층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고 박정희의 강압 정책은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의 실천적 토대를 조성하는 정치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던 때문일 것이다.

이후 신군부와 민중주의의 착종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 성장은 꾸준히 진행되었고 이제는 G20의 권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원조를 받아야 했던 말단의 후진국에서 원조를 줄 시혜국으로 오르는 희귀한 성공 사례를 만들면서 정치적 민주화도 안정된 정착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의 앞장에서, 그러니까 경제 발전과 산업화의 현장 진행을 추동한 주력 집단으로 바로 한글 세대의 주체들, 4ㆍ19 세대의 주류들이 열정적으로 활약하고 있어왔다는 자부심을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세력의 주체들과 자유를 억압하며 유신을 강요한 정치 세력 간의 길항, 그리고 1960년의 4ㆍ19와 이듬해 1961년의 5ㆍ16의 배리는 나를 오래 괴롭힌 역사학적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떻게 정치적 질곡 속에서도 든든한 민주주의의 신뢰받는 땅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 자유의 고통스런 신음 속에서도 어찌해서 경제적 선진의 대열에 끼어들 수 있었는지, 빈곤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성장해온 나로서는 이 기적적인 사태가 여전히 수수께끼이지만 그 전환의 고리가 4ㆍ19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그 고리들을 꿰는 것이 이 4월 학생 혁명이 일군 자유와 근대적 지성이며 그 힘이 교육에서 축적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한 좌담에서 그 계기를 이루는 4ㆍ19와 5ㆍ16이 근대화를 향한 이인삼각의 달리기 같다고 짚어본 적이 있다. 한편의 민주주의, 다른 한편의 자본주의가 서로를 당기고 겯고 하며 내딛는 걸음이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을 일군 우리 현대사의 멋진 역정이겠다 싶었던 것이다.

20대의 나는 역사란 진지한 얼굴이어야 한다고 소박하게 생각했지만, 70대의 관대한 나이에 이르러 결정적인 역사의 도래는 오히려 희극적인 역설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진실을 깨우치고 있는 중이다. 역사란 다양한 해석들의 집적과 지혜로운 가치 부여 속에서 사건의 진상들이 꿈틀거리며 새로운 인식으로 확장되는, 어쩌면 진화적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실례를 혁명이었다가 의거였다가 기념이었다가 다시 의거로 바뀌어온 4ㆍ19에 대한 평가의 부침에서 발견한다. 문제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시선이고 시선에 얹혀진 의미이며 여기에 투사된 미래에의 전망이다. 역사는 그렇게 해서 풍요해지고 현재화하는 것일 터인데, 4ㆍ19가 우선은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 혁명이었고 자아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문화적 혁명으로 확산되었으며 마침내 경제적 선진을 유도하는 산업의 혁명으로 확충되었고 그래서 정치-경제-문화를 아우른 선진 근대로의 변혁을 이룬 한민족 역사의 대역사(大役事)로 정립되는 것은 이러한 변증을 통해서였다.

나의 그 믿음에 확신을 주는 것이 4ㆍ19 정신을 대표할 김지하 시인이 내게 그려준 난초 그림 속의 한 문장이다. 꿈틀거리는 난초 잎사귀 위의 여백에 그것은 진한 붓글씨로 이렇게 씌어져 있다. "꽃피는 4월은 혁명 중에서도 대혁명이다."

■ 약력

▦1938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1965~75년 동아일보 기자 ▦1975년 한국기자협회장 ▦1970년 평론가 고 김현, 김병익, 김주연과 계간 '문학과 지성' 창간 ▦1975~2000년 문학과지성사 대표 ▦2005~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초대 위원장 ▦비평집 <전망을 위한 성찰> <열림과 일굼> <21세기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등 ▦대한민국문학상,팔봉비평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현 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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