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의 다다스 숲에 살고 있는 너구리 가족에게 생존경쟁이라는 자연계의 법칙이 유명무실해진지 이미 오래다. 너구리를 공격하는 큰 야생동물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 게다가 너구리는 잡식성이라 무엇이든 먹기 때문에 산에 살든 거리를 헤매든 맛난 음식이 가득하니 행복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조용하고 평화로운 너구리 가족에게 1 년에 한 번씩 오는 악몽이 있다. 바로 인간들의 '너구리 냄비요리'의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구리들은 먹이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선 짐승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인간이 너구리 냄비요리를 먹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왜 굳이 너구리 요리를 먹어야 하냐는 물음에 인간은 사랑하니까 먹는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모리미 토미히코의 소설 <유정천 가족> 의 너구리 이야기다. 유정천>
소설을 읽는 동안 차량에 치어 죽은 우포 늪의 삵이 내내 생각났다. 호랑이나 늑대가 사라진 우리나라 생태계에서 먹이사슬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삵. 그의 사고 소식은 우포 늪에서 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방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소개된 뒤 불과 며칠만의 일이었다.
겨울이 길어지는 동안 야생의 동물들은 살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보릿고개도 그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먹이가 되는 식물은 깊은 눈 속에 파묻혀 드러나지도 않을뿐더러 눈 위를 지나간 흔적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겨울을 극복하지 못해 자연사하는 일이야 불가항력이라 하겠지만, 인간의 무분별한 포획에 의해 떼죽음을 당한 동물들은 현대의 야생동물 잔혹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보릿고개도 먼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넘쳐나는 먹을 거리로 골라 먹는 시대를 살고 있건만, 사람들은 낟알에 독극물을 뿌려 새를 죽이고, 개천에 화학약품을 풀어 겨울 잠을 자는 개구리를 잡는다. 총을 쏘아 가련한 짐승을 죽이고, 산채로 털을 벗긴다. 독극물을 먹고 죽은 새나 약물을 먹고 죽은 개구리를 먹어 얼마나 몸이 호사로울까. 도대체 그들의 정신 건강은 온전하기나 한 것인가. 사랑하기 위해 먹는 것도 아니고 배가 고파 먹는 것도 아닌 이 잔혹한 포획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굳이 먹이로 삼아서 사람들이 야생동물의 천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해마다 엄청난 수의 야생동물이 차에 치여 죽는다. 직선으로 이어진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이 얼마나 위험한지 동물들은 알지 못한다. 야생동물 출몰지역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도로의 경계 너머에서 허기진 눈빛으로 서성이는 짐승을 생각하라. 사람들이 불법으로 포획한 야생동물들은 기실 삵의 먹이가 되었어야 했다. 들판의 새들만 잡을 수 있었어도 삵은 먹이를 찾아 위험한 도로로 내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난 겨울 강원도의 한 스키장 숙소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베란다에 내다 놓은 광경을 보면서 문득 배고픈 산짐승을 불러들여 불행한 일을 초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과 야생동물이 공존하는 곳에서 인간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곳에 근무하는 제자에게 야생동물 출현의 위험을 알리고 음식물 보관에 대한 안내문 설치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야생동물 출현에 대한 경고는 방문자들을 위협하기보다는 야생의 흥분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흐뭇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문득, 며칠 뒤에 있을 방문에 앞서 아이디어 덕에 승진은 고사하고 이 신중한 안내문이 누군가의 식욕을 자극하는 문구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차윤정 생태전문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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