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출토된 신라시대 순금 금관은 모두 5점이다. 1921년 처음 출토된 금관총금관과 1924년 금령총금관, 1926년 서봉총금관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발굴한 것이다. 광복 후 우리 손으로 발굴한 최초의 신라금관은 천마총금관이고, 두 번째가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이다. 경주 교동 출토 금관도 있지만 형태면에서 차이가 있어 형식이 동일한 것은 이 5점의 금관이 전부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은 그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금관은 왕만 썼다는 상식을 깨는 계기가 됐다.
황남대총은 경주 황남동의 고분공원 내, 즉 대릉원(大陵園)에 있는 신라시대 최고 최대의 부부무덤으로 쌍분 또는 표주박처럼 보인다고 표형분이라고 불린다. 규모를 보면 동서 길이만 120여m에 이르고 높이는 22m가 넘는다.
이 무덤은 1971년 청와대 주관으로 경주관광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이 마련되면서 발굴됐고, 당초에는 관광자원화하고자 했다. 발굴 결과 남쪽 무덤 주인이 남성이고 북쪽 무덤의 주인이 여성임이 밝혀졌고, 남성 무덤이 먼저 마련된 후 북쪽 무덤이 마련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남편이 먼저 죽고 난 후 부인이 죽어 쌍분이 되었던 것이다.
경주 평지에 있는 신라무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답게 발굴조사를 통해 수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여성 무덤인 북분에서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어 금관 용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게 되었다. 즉 먼저 죽은 남편의 무덤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분에 따른 부장용품인지 실질적으로 여성이 사용한 것인지 뚜렷하지 않아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연구자마다 나름의 주장은 있지만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가서 알아보지 않고는 정답을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발굴조사 후 학술적으로 작명한 이름이 바로 황남대총이다. 이 이름은 경주시가지의 황남동에 분포하고 있는 신라무덤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란 의미다. 내부를 공개하려던 계획은 천마총이 대신 공개되면서 유보됐고, 대신 원상 복구해서 정비만 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출토된 유물만도 수 만점에 달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무엇보다도 무덤의 주인공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전된 고고학적인 상식으로 보면 출토된 유물의 성격이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걸친 것으로 보여 그 무렵의 임금을 보면 나물왕, 실성왕, 눌지왕, 자비왕, 소지왕으로 좁혀진다.
그 가운데 어느 임금의 무덤인지가 밝혀지면 자연 그 임금의 왕비 무덤이 될 것이다. 아무리 발굴을 완벽하게 했다고 해도 무덤의 주인공은 오리무중이다. 이것이 고고학의 한계인지 모른다. 언젠가는 명백하게 주인공이 밝혀지게 되면 무덤의 명칭도 자연스럽게 바뀌게 될 것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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