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는 역대 원정 월드컵에서 번번이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쓴맛을 봤다. 유럽 축구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다. 축구 국가대표팀은 원정 경기로 열린 월드컵 본선에서 유럽 팀을 상대로 4무8패의 일방적인 열세를 보이고 있다. 그때마다 '유럽 축구를 상대로 쌓은 경험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이후 한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봇물을 이뤘다.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과 이영표(알힐랄ㆍ당시 토트넘)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던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6강 진출이 무산된 후 대표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박지성, 이영표 같은 수준의 선수들이 좀 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반복됐던 이 같은 푸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을 이끌 주춧돌이 유럽리그에서 연일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데다 과거에 비해 유럽 축구를 경험한 선수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일취월장한 젊은 피
4년 전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의 절대적인 존재는 박지성이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매 경기 그의 포지션에 변화를 주는 이른바 '박지성 시프트'로 경기를 치렀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아마도 '박지성 같은 선수가 하나만 더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했을 지 모른다.
박지성은 지금도 대표팀 주장으로서 경기장 안팎에서 중심 축을 잡는다. 그러나 이전처럼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불과 1년 사이에 그에 필적할 만큼 훌쩍 커버린 '젊은 피'의 존재 탓이다. 이청용(볼턴)은 잉글랜드 데뷔 시즌 5골 5도움을 기록하며 박지성의 EPL 시즌 최다골 기록 경신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입단 첫 시즌 성공적인 적응 여부조차 불투명했지만 어느덧 팀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성용(셀틱)은 이적하자마자 붙박이 '야전 사령관'자리를 꿰찼다. 세트 피스 전담 키커로 기용되는 등 스코틀랜드 최고 명문에서 존재 가치를 높이고 있다.
박주영(AS 모나코)은 '축구 천재'라고 불리던 시절의 잠재력을 활짝 꽃피웠다. 시즌 9호골을 기록하며 팀의 주포로 자리를 굳혔다.
넓어지는 전술 활용폭
허정무 대표팀 감독은 지난해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한 후 국내에서 치른 세 차례 친선경기에서 박지성과 박주영의 포지션에 변화를 주며 다양한 공격 조합을 실험했다. 공격 라인의 중추에 위치한 '해외파 4인방'의 개인적인 발전의 팀 역량 증대와 직결된다. 이들의 특성을 조화시킨 다양한 공격 전술이 가능하다.
박주영은 소속팀에서 원 스트라이커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지만 좌우 날개로도 뛸 수 있다. 박지성은 대표팀에서 왼쪽 측면 뿐 아니라 처진 스트라이커(공격형 미드필더)로도 종종 기용된다. 오른쪽 날개가 주포지션인 이청용은 EPL 진출 후 소속팀에서 왼쪽과 중앙 미드필더로도 출전해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K리그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적극적인 문전 쇄도도 돋보인다.
이들의 '멀티 플레이' 능력과 정교한 패스워크와 넓은 시야, 세트 피스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킥 솜씨를 지닌 기성용의 게임 리딩이 한데 조화를 이룰 경우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발휘될 것으로 기대된다.
무형의 자산으로도 큰 몫
이들의 활약은 동료들에게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자신감을 높일 수 있고 월드컵에 대한 확실한 동기 부여도 된다.
염기훈(울산)은 지난 1일 대표팀 훈련이 끝난 후 "해외파들의 활약은 자극제도 될 수 있고 보고 배울 점이 많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박주영과 기성용, 이청용은 K리그에서 유럽으로 직행해 순조로운 적응을 보이며 붙박이를 꿰찼다. 더 이상 한국 프로축구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님을 실력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유럽,남미 선수라고 해서 지레 기가 죽을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해외 진출 혹은 복귀를 노리는 이들에게는 동기 부여의 계기가 된다. 최근 염기훈과 구자철(제주)은 EPL 입단을 제시 받았지만 해외 진출의 기회를 월드컵 이후로 미뤘다. 유럽 진출을 추진하다가 실패한 이근호(이와타)도 '해외파'의 활약에 남다른 각오를 다질 법 하다.
'현역 해외파' 외에 유럽 축구를 몸으로 체험한 이들이 많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조원희, 김두현(이상 수원), 설기현(포항), 오범석(울산), 이동국(전북), 김동진, 김남일(톰 톰스크)에게도 유럽 축구는 낯설지 않은 대상이다.
김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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