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대학 진학 때 고향을 떠나 15년 넘게 서울사람으로 살다가 직장 때문에 고향 아닌 다른 지방 도시에 자리 잡고 여태껏 살고 있다. 내가 잠깐 동안이나마 '서울 사람'이었을 때의 일이다. 가깝게 지내는 경상도 토박이 선배 한 분이 대구에서 대학교수로 있었다.
'특별 서울'과 '보통 지방' 인식
선배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배가 불쑥 "시외전화 지역번호가 지방은 세 자리, 네 자리인데 서울만 두 자리인 게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서울은 그때나 지금이나 지역번호가 '02'두 자리고, 지방은 광역시는 세 자리, 그 밖의 소도시와 군 단위 지역은 네 자리였다가 한참 뒤 모두 세 자리로 바뀌었다. 선배는 서울의 두 자리 지역번호를 '부당한'특별 배려라고 보고 언짢은 감정을 토로한 것이다.
평소 깊이 생각해본 문제가 아니기도 했지만 나는 당시 선배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선배의 불만 섞인 말에 내가 했던 답변을 지금도 기억한다. "서울이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서울특별시민스러운'답이 입에서 나왔다. 한 나라의 수도인 서울에 그만한 특전이 부여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나 보다. 서울사람으로 10년 넘게 살다 보니 서울의 특별함을 '천부적 권리'내지 '자명한 진리'쯤으로 여기게 된 모양이었다.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지방에서 여러 해 살면서 오래 전 했던 나의 답변을 이따금 떠올리곤 한다. 어떻게 "서울이니까 당연하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튀어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의아하다. 그러니 몇 해 전 경국대전과 관습헌법까지 거론해가며 서울만이 대한민국의 수도라고 판결한 헌법재판관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서울에 머물렀던 나 같은 뜨내기도 서울의 '특별함'을 추호의 의문 없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 하물며 '신성 가족'의 웃어른인 헌법재판관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이완구 전 충남도지사의 말이다. "서울과 붙어 있는 어떤 수도권 도시에서 3,200억 원을 들여 청사를 지었습니다. 서울의 어떤 구청은 850억 원짜리 동(洞)단위 주민 센터를 짓겠다고 했습니다. 충남에 16개 시, 군이 있는데, 그 중 12개가 1년 세입이 800억 원이 안 됩니다. 전국에 산부인과 병원이 하나도 없는 시, 군도 적지 않습니다. 서울 사람만 사람이고 지방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까?"
'특별 서울'과 '보통 지방'의 구분은 오래 전부터 서울의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는 거의 보편적 정서인 듯하다. 그리고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는 이 정권의 핵심 실세들 역시 서울의 특별함에 추호의 의문도 품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 심정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방의 박탈감 헤아리길
하지만 거기까지다. 사사로운 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들의 공적인 정책까지 용납되는 건 아니다. 최근 여론 흐름의 밑바닥에는 지방의 박탈감을 모르는 반쪽
짜리 장삼이사 리더십이 '전국'을 요리하는 걸 못 봐주겠다는 지방 사람의 정서가 깔려있는 건 아닐까? 유난히 강한 우리 국민의 평등의식이 이제 '지방의 분노'로 표출되고 있는 건 아닐까?
21세기 동아시아 세력판도를 서울 중심으로 돌파해야 한다며 분산과 균형의 명분을 폄하하는 일각의 주장은 공허하게 들린다. 제 나라 땅도 균형감 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서울 안 개구리'가 그 넓은 동아시아를 바라볼 안목은 있을까? 하긴 당내 통합도 못 이루는 협량에 국민 통합을 기대하긴 더욱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한'나라'의 살림을 맡은 정치인이라면 역지사지의 상상력도 있어야겠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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