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봄 장관실로 찾아온 일산 주민대표들은 주변 땅값이 많이 올라 농사지을 대토를 마련하기 어려우니 땅을 정부가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한 대책을 찾아보도록 했는데 마침 좋은 대안이 나왔다.
일산에서 가까운 파주군 교하면 문발리(일산대교 부근)에 48만평의 한강 고수부지 갈대밭이 있었다. 이 갈대밭을 개간하여 농민들에게 후하게 현물 보상해주면 되겠다 싶어 토개공으로 하여금 개발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그런데 실행준비를 해놓고 막상 희망 농가를 조사해 보니 의외로 희망자가 한사람도 없었다.
일산 개발이 있기 전 현지를 잠행하여 지가를 알아 본 결과 대부분의 전답이 평당 3만원 내외였다. 건설부에서는 당초 평당 5~6만 원의 보상이면 충분하다고 보았으나 점점 보상가격이 올라 최종적으로는 평당 10만~15만원으로 보상이 이루어졌다. 결국 농민들은 농지보다 현금으로 보상받기를 원했던 것이고 그래서 갈대밭 농지개발 계획은 불발로 끝났다.
일산신도시 건설 골격이 대충 완성되면서 마지막 남은 일은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것이었는데 대통령의 구두 재가를 받은 것은 89년 4월16일 태릉 골프장에서였다. 이날은 일요일인데 오랜만에 노태우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을 태릉으로 초청하여 골프를 치는 날이었다. 대통령은 육사 동기인 김식 농수산 장관과 한 조가 되어 나가고 나는 바로 뒤따라 나갔는데 앞 조에서 김식 장관이 홀인원을 해서 환성이 터지던 날이었다.
나는 긴급보고사항이 있다는 것을 운동 중에 말씀 드린 뒤 목욕을 마치고 잠시 휴식하시던 대통령에게 지도와 계획서를 가지고 다가갔다. 그 자리에서 안보상의 문제로 기피하고 있는 한강 이북지역에도 신도시 하나를 지을 필요가 있다는 역발상의 논리, 신도시의 입지로 일산을 선정하게 된 과정, 그리고 일산신도시 건설계획에 관한 자세한 보고를 드렸다. 그런데 대통령은 뜻밖에도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대통령은 9사단장을 지냈는데 사령부는 바로 일산 신도시의 백마역 부근에 있었다. 일산과 문산 일대가 모두 9사단 관할 지역이어서 내가 설명 드리는 일산 신도시의 건설지역에 대해 나보다도 더 소상히 알고 있었다.
대통령은 당시 박철언 정책수석을 앞세워 대북 및 대공산권에 대한 이른바 북방외교정책을 의욕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었으며 영종도에 신국제공항 건설을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국가안보 및 대북정책 그리고 인천 공항과의 연계발전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일산 신도시 건설은 좋은 발상이라고 나를 격려해 주셨다.
다만 대통령은 두 가지를 주문했다. 하나는 한강 북쪽에 대한 기피증이 있는 만큼 다른 곳 보다 더 쾌적한 도시로 지을 것과 행주산성에서 한강과 임진강을 따라 임진각까지 도로를 낼 수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자유로이다.
나는 처음부터 일산을 더 쾌적한 도시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그렇게 설계하고 진행해 왔다. 그때까지 가장 쾌적하게 개발된 곳은 목동이었는데 분당은 대체로 목동과 같은 수준으로 했고 일산은 이보다 훨씬 더 쾌적하게 설계했다는 점을 보고 드렸다.
그리고 도로 개설문제는 일산의 개발이익으로 추진토록 해보겠다고 말씀 드리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이렇게 해서 일산 신도시는 태어나게 된 것이다.
89년 6월14일 나는 자유로 건설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현지답사에 나섰다. 그때 현재의 자유로 자리는 높은 철조망이 쳐있는 작은 둑인데 민간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전방과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철조망에는 적이 침투하면 식별할 수 있도록 작은 자갈과 깡통 등이 매달려 있었고 간간이 작은 망루가 있었는데 그 밑을 집총한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둑에는 작은 차가 겨우 비켜갈 정도의 군용 비포장도로가 있었는데 굴곡이 심해 일반차량은 주행이 어려워 군용차량을 이용해야 했다.
비가 무척 많이 내린 날이었으나 군의 협조 때문에 미룰 수가 없었다. 건설부에서는 국ㆍ과장 과 기자단을 합해 20여명, 군에서는 대령 지휘 하에 10여명의 군인과 여러 대의 차량이 참여했다.
행주산성의 일미집에서 점심을 마치고 군용차량으로 한강변을 따라 이동하여 심학산에서 일산 신도시 건설을 맡은 토지개발공사로부터 사업 브리핑을 받고 다시 이동하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오두산에 이르렀다.
지금은 여기 큰 전망대가 세워져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지만 그 때는 방탄용 벙커만 있던 민간인 통제 지역이었다. 여기서 군으로부터 한강 건너 바로 600m 앞에 있는 북한군과의 대치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망원경으로 처음 보는 북한은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말?수 없는 감회를 내게 주었다. 여기서 임진강을 따라 황희 정승이 말년에 시를 읊으며 비둘기들과 더불어 지냈다는 문산 반구정(伴鳩亭)을 거쳐 임진각에 왔다.
이 답사를 계기로 자유로 건설은 사실상 확정됐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소외된 민통선 지역인 반구정에 황희 정승 사당이 있고 유명한 황복과 메기 매운탕 집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도 기대치 않은 소득이었다. 내가 장관직을 물러나고 며칠 뒤 길을 물어 찾아 간 곳이 바로 반구정의 그 임진강변 매운탕 집이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