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운이 다했음을…" 마지막 어전회의 열었던 순종의 비애 서려
1910년 8월 29일 병합조약 공포로 시작돼 1945년 8월 15일 막을 내린 일제의 한국 강점은 한국 근현대사 최대의 사건이었다. 1910년 이후 2010년까지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는 것은 다가올 100년을 대비하기 위한 기획이기도 하다. 한국근현대사학회(회장 한철호 동국대 교수)와 공동기획으로 오늘부터 매주 화요일자에 연재하는 '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는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이 땅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냈던, 여전히 생생한 자취로 남아있거나 혹은 희미하게 지워져가고 있는 역사의 공간을 탐방하는 현장기행이다.
깊고도 깊었다. 궐내에 발을 디딘 뒤 밭은 숨을 연신 내쉬어야 도착할 수 있는 깊고 깊은 그곳. 구중심처라는 문자를 그대로 현현하는 창덕궁 내전인 대조전의 부속건물 흥복헌(興福軒). 창덕궁을 찾아온 관람객들도 이들을 안내하는 문화해설사들도 무심히 지나치는 이 작은 건물은, 그러나 백년을 산 것보다도 더 많은 슬픔을 홀로 감당하고 있는 공간이다.
1907년 7월 강제 퇴위한 고종에 이어 대한제국 두번째 황제로 등극한 순종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해 11월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다. 순종이 재위기간 동안 정무를 본 곳은 궁정과 면해 있는 희정당. 그러나 500년을 이어왔던 조선 왕조는 군주의 공식 집무공간이 아닌 왕비의 침전에서 마지막 숨을 내쉰다. '복을 일으켜준다'는 뜻의 흥복(興福)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에서였다.
1910년 8월 22일 월요일 오후, 순종이 주재하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다. 어전회의의 안건은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순종의 전권위임 승인건. 대조전에 대한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진 상태에서 일본측과 사전조율을 끝낸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법무대신 이재곤 등의 각료와 황제의 시종무관 등이 참석한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어느 왕조의 종말이 비감하지 않을까만 흥복헌 복도에서 이 회의를 지켜본 한 일본인 관리는 그 풍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긴장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나라의 운명이 여기서 결정되고 마는구나 하는 몹시도 슬픔이 감도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어전회의는 약 한 시간 만에 끝났으며 마침내 왕 전하께서 이완용 총리에게 한일병합협약 체결 전권위원장을 내리셨다."(궁내부 사무관이던 곤도 시로스케의 '대한제국 황실 비사'에서)
지금의 흥복헌은 회의가 열렸던 당시 건물은 아니다. 1917년 창덕궁 대화재로 대조전이 불타고 3년 뒤 복원한 건물이다. 1979년부터 개방된 창덕궁의 관광코스에 들어가있지만 일반인은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다. 잊고 싶지만 기억해야 할 흥복헌의 슬픈 역사는 100년이 흐른 오늘 '1910년에는 경술국치라는 치욕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던 역사현장'이라는 안내책자의 한 문장으로만 박제돼 있다. 창덕궁 문화재해설사 원원정(33)씨는 "순종의 비 순종효황후가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 이야기를 듣고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주지 않으려 했다는 야담을 알고 있지만, 관람객들에게 굳이 설명해주지는 않는다"고 심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창덕궁이 구 권력의 상징공간이라면 새로운 지배권력은 남산 기슭인 중구 예장동 일대를 차지했다. 식민지 시기 '왜성대(倭城臺)'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일대는 1926년 광화문 신청사로 이전하기 전까지 조선총독부(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경성신사(숭의여자대), 일본 헌병사령부(남산골 한옥마을), 일본인 관리들의 관저 등이 자리했던 곳. 식민지 시기 일본인들이 '왜성대'라는 지명의 연원을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들이 이곳에 진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을 정도로 일본인들과 각별한 인연을 가진 공간이기도 하다.
순종으로부터 전권위임장을 받은 이완용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어디였을까. 일본 헌병대가 각료들을 위압적으로 감시하는 가운데 맺어진 을사조약의 체결지인 중구 정동의 중명전(重明殿)이 사적지로 지정돼있는 것과 달리,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이 한일병합조약문에 서명을 한 장소, 즉 실제 경술국치의 현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간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창덕궁 아니면 경복궁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분분했지만 논란을 잠재우고 그 장소가 일제의 통감관저(나중에는 총독관저)였음이 확인된 것은 끈질긴 한 민간 문화재연구가 덕택이었다. 그곳은 옛 중앙정보부 관내에 있던 현재의 서울유스호스텔 진입로 인근으로, 지금은 인적 드문 작은 공원이 돼 있다. 현장에는 몇 개의 벤치와 가로등이 있는데, 옛 자료사진 속 총독관저 입구 양편의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들만이 우뚝 ?있어 그 터임을 짐작케 한다.
유심히 살펴보면 이곳에서는 통감부가 설치되기 전까지 한국병합을 진두지휘한 인물인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동상이 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상은 1936년 당시 일제 총독 미나미가 관저 앞에 세운 것으로, 동상의 좌대 판석이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느티나무 부근에 돌벤치처럼 가로로 눕혀져 있어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증언하고 있다.
시인 김수영은 시 '거대한 뿌리'에서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고 했다. 치욕의 역사라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일대가 식민 지배권력의 핵심지였음을 알려주는 것은 2003년 서울시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앞에 설치한 '통감부 터'라는 표석 하나가 전부. '더러운 역사'를 우리는 너무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울시는 올해 '남산 역사성 알리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시대와 관련된 표석들을 이 일대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1913~1921년 창덕궁- 남산 직통도로 완공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이 발표된 후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용상은 치워졌다. 대한제국 황제에서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은 1926년 4월 세상을 뜰 때까지 '살아있지만 목숨만 붙어있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창덕궁과 마주하고 있는 일제 식민권력의 심장부인 남산 총독관저를 찾는 일은 순종으로서는 치욕적인 행차였을 것이다. 병합조약 체결 한 해 전인 1909년 10월 암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조문하기 위해 통감관저를 찾은 바 있던 순종은 병합조약 체결 이후에는 일본 천황의 생일을 경축하거나, 천황의 죽음을 조문하거나, 총독의 하례에 답방하는 의전행사를 위해 시시때때로 남산을 찾아야 했다.
민간 문화재연구가 이순우(48)씨는 최근 펴낸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에서 '구 권력'(창덕궁)과 '신 권력'(총독부)을 연결하는 길의 변천사를 주의깊게 들여다봤다. 순종의 행차 경로는 당시 신문기사에 상세히 기술돼 있는데, 보통 창덕궁에서 출발해 종로3가와 보신각을 지나 광교를 건너 충무로를 거쳐 예장동에 도착하거나, 청계2가 부근의 수표교를 이용하는 행로를 따랐다. 창덕궁에서 남산을 연결하는 남북도로가 있긴 했지만 좁고 민가들이 들어차 있어 행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술국치일에 순종의 전권위임장을 들고 창덕궁에서 통감관저로 간 이완용의 행로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이씨는 추정한다. 통감관저,>
1927년 '경성도시계획자료조사서'에 따르면 창덕궁과 남산을 잇는 남북간 직통도로인 '돈화문통' 공사는 1913년 시작돼 1921년 완료됐다. 이 도로에서 청계천을 건널 수 있는 다리인 관수교는 1918년 완공됐다. 남산과 창덕궁을 오가야 했던 총독부 관리들로서는 왕래가 훨씬 원활해져 반색했겠으나 망국의 황제가 길 위에서 느낀 굴욕감은 한층 더했을 것이다. 이 도로가 창덕궁, 종로3가역, 을지로3가역, 충무로를 잇는 현재의 돈화문로다.
■ 공포 칙유문에 '국새' 대신 어새 순종의 친필 서명도 빠져 있어 병합조약은 성립 자체가 안돼
일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과정에서 합법적인 형태를 띠려고 전력을 기울였다. 5년 전 을사늑약을 맺으면서 무력까지 동원해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했지만, 외부대신의 날인을 받는 데 급급한 나머지 공식 명칭마저 써놓지 못한데다 서명자인 한국 외부대신과 일본 공사의 전권위임장뿐만 아니라 황제의 비준서도 없어서 국제법적인 절차와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통감 데라우치는 미리 총리대신 이완용을 관저로 불러 합의적인 '병합' 조약의 형식을 취한다는 명분 아래 그로 하여금 각의를 거친 후 순종으로부터 전권위원 위임장을 받아내도록 요구했다. 어전회의 당일에도 그는 불의의 사태를 막기 위해 시종원경 윤덕영 등에게 사전에 준비한 '전권위임에 관한 칙서안'을 건네주면서 순종과 내각대신들을 설득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겉으로만 동의를 통한 합의를 내세웠을 뿐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10년 8월 22일 순종에게 전권위원 위임장을 받은 이완용이 데라우치와 맺은 '한국병합조약'은 이전 조약들과 달리 전권위임장, 순종의 서명, 대한제국 황실의 공식 국새인 '대한국새(大韓國璽)' 날인 등 형식상 정식 조약의 요건을 갖추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비준 대신 조약을 공포하고 '병합'을 알린 8월 29일자 순종의 칙유문에 전권위원 위임의 칙서에 사용된 대한국새가 아니라 행정 결재에만 사용되는 '칙명지보(勅命之寶)' 어새가 찍혀있을 뿐이며, 황제의 친필 서명이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일제가 그토록 합의와 합법을 가장해 조약의 형식을 갖추려고 애썼지만, 결과적으로 비준서에 해당하는 '병합' 공포 칙유문에 조약상 필수요건의 결격사유가 생기고 말았다. 한마디로, '한국병합조약'은 불법이나 합법을 따지기 전에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은 셈이다.
현재 한일 양국 간에는 병합조약의 불법ㆍ합법 혹은 부당ㆍ합당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과 배상, 그리고 오늘날 일본의 역사인식을 정확히 가늠하는 현실의 문제이다. 을사늑약과 '한국병합조약'의 성격 문제가 1991년 북일 국교 정상화 협상의 진행과정에서 쟁점 사안으로 떠올랐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올해 한국강점 100년을 맞이해서 일본이 진정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확실하게 책임지는 태도를 취해주기를 기대한다.
한철호ㆍ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