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롱우드가든(Longwood garden)'은 '듀퐁 가든'으로도 불린다. 원래 공원이었는데 울창한 나무들이 벌목 위기에 놓이자 1906년 대부호였던 피에르 듀퐁이 사들여 정원으로 꾸몄다. 세계적 화학회사 듀퐁의 바로 그 오너 가문이다.
처음엔 개인 별장으로 썼지만, 듀퐁 가문은 재단을 만들어 롱우드가든을 사실상 사회에 기부했다. 130만평 대지에 수많은 식물들이 4계절 내내 환상의 조경을 연출함으로써, 지금은 매년 수십만 관광객이 찾는 미 동부의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됐다. 수년 전 미국연수시절 크리스마스 즈음에 이 곳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 화려한 트리 장식과 천상의 캐럴 화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마당에 '희원(熙園)'이 있다. 삼성이 1997년에 조성한 우리나라 전통 정원이다. 수많은 꽃과 나무들, 각양각색의 석조물, 미술관 내 수많은 문화재까지 가히 명소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몇 해전 봄에 이 곳에 간 적이 있는데, 희원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특히 벚꽃으로 우거진 주변 풍광은 아직도 생생할 정도다.
삼성에 대한 평가는 늘 논란의 대상이지만, 그래도 '잘 한 일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희원'을 주저 없이 상단에 놓겠다. 반도체 신화를 이룬 것, 코리아 브랜드 가치를 높인 것, 세금을 많이 내는 것, 고용을 창출하는 것, 이 모두가 커다란 국가적 기여들이지만 멋진 정원을 만든 것 또한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본다.
통상 기업의 역할을 경제적 가치로만 국한짓는 경향이 있다. 투자하고, 고용하고, 수출하고, 세금 많이 내는 게 최고의 애국이라고들 믿는다. 물론 맞는 얘기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와 함께 성장해온 대기업이고 부호가문이라면 그 이상의 기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듀퐁이 롱우드가든을 만들었고 삼성이 희원을 꾸민 것 같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화, 예술, 감동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사실 정부라면 이런 정원은 절대 못 만든다. 관료의 손을 타는 순간 창의와 미학은 사라진다. 아낌없이 돈을 투입할 수 있는, 이익이 안 나도 전혀 아까울 것이 없는 안목과 사명감이 있는 대기업, 부호, 명문가만이 가능한 일이다.
12일은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탄생 1세기를 맞아 다양한 재조명 프로그램들이 마련되고 있는데, 개인적 생각으론 그의 문화적 혹은 사회공헌적 업적도 다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업인, 대부호가 돈 많이 버는 것 말고 국민 정서와 감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희원의 터전을 닦은 호암을 통해 되새겨보자는 것이다(희원 자체는 호암 사후 조성됐다).
롱우드가든에서 만난 한 현지인으로부터 "이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준 듀퐁 가문에 감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듀퐁도 화학회사다 보니 환경론자 등으로부터 비판도 많이 받지만 그건 그거고, 사재로 만든 아름다운 공원을 사회에 돌려준 것은 또 그것대로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삼성도 그런 맥락에서 봤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경제력이면 이 정도 됐으면 제2의 희원 같은 곳이 더 나올 때도 됐다고 본다. 꼭 정원이 아니어도 좋다. 어쨌든 다른 대기업이나 부호들이 좀 해줬으면 좋겠다.
이상철 경제부장 sc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