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발생해 세계적 공포를 몰고 온 신종플루(H1N1)는 과장된 것일까. 신종플루로 인한 사망자 수가 주춤하고, 감염 추세도 지난해 10월 이후 한풀 수그러든 것으로 나타나면서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해 6월 최고 경보 단계인 '대유행(pandemic)' 선언을 한 것이 '사기'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
급기야 지난달 유럽회의 의원총회 볼프강 보다르크 보건위원장은 "신종플루 대유행 사태는 제약회사들이 꾸민 허위이며 금세기 최대 의학 스캔들"이라고 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제약회사들이 백신과 치료약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 위해 신종플루 공포를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백신 잉여 사태, 주문 취소 속출
WHO가 신종플루에 대한 위험성을 '대유행'으로 선언한 뒤, 세계 각국의 백신 확보에는 즉각 비상이 걸렸다. 프랑스는 제약회사에 총 인구수에 조금 못 미치는 6,000만명분을 주문했으며, 네덜란드 또한 1,900만명분을 주문했다. 미국도 2억5,100만명분을 구입해 이 중 1억6,000만명분을 의료계에 분배했다.
미 시사주간 타임은 "각 국가의 보건 담당 관리들은 한 사람당 백신 2회분을 확보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으며 그러한 가정하에 제약회사들과 계약했다"고 보도했다. 선진국들이 자금력을 바탕으로 백신을 '싹쓸이'하면서 개발도상국은 구할 수 없게 되는 백신 '부익부빈익빈' 현상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백신을 한번 접종하는 것으로도 면역 형성에 충분한 것으로 나타난데다가 '대유행'을 점쳤던 신종플루의 위세는 예상보다 강하지 않았다. 미국만해도 "인구 63% 감염에 9만여명 사망" 등 전세계적으로 수백만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지만, 1월 현재 1만4,000여명에 불과하다.
때문에 백신 확보에 골몰했던 국가들은 불과 6개월여 만에 잉여 백신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고심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백신 12억5,000만달러 어치를 구입했던 프랑스의 경우 백신 접종은 500만명분에 그쳤으며, 5,000만명분 중 일부는 주문을 취소하거나 재판매할 방침이다. 독일도 주문한 5,000만명분 백신 가운데 절반을 취소하거나 다른 나라에 파는 방안을 논의 중이며,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등도 남는 백신 처리 방안에 혈안이다.
WHO, 제약회사와 결탁 의혹
신종플루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백신 잉여 사태를 제약회사와 WHO가 만들어낸 '음모'의 증거이자 WHO가 신종플루를 과장했다는 근거로 보고 있다. 신종플루에 대한 위험성을 강조해 엄청난 이익을 얻으려는 국제 제약회사들이 WHO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지난달 26일 유럽회의 내 유럽연합(EU) 인권 감시단체가 실시한 청문회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로이터는 "청문회에서는 'WHO가 제약회사들로부터 돈을 받는 등 이해관계가 있는 전문가들에 너무 많은 자문을 구하고 있다'는 의혹에 대해서 집중적인 조사가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WHO는 부인했지만 제약회사가 지난해 6월 대유행 선언 이후, 많은 국가와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백신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은 의혹을 낳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비판론자들의 주장이다.
신종플루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일반 계절독감보다 치명적이지 않은 신종플루가 단지 '감염성'이 높다는 이유로 '대유행'이 선언됐다는 것이다.
누구 말이 맞을까
신종플루 위험성이 '사기'라는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WHO는 이를 극구 부인하며 대응이 적절했다고 자평하는 한편, 신종플루 '대유행'은 여전하다는 입장이다. 학자들간에도 의견은 엇갈린다. 신종플루가 심각하지 않다는 의견과 "항상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로서는 신종플루가 끝나는 과정과 유럽회의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k.co.kr
■ "대유행 선포로 제약사에 황금의 기회줬다"
전 세계가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로 떨었던 지난해 가장 큰 이익을 본 이들은 관련 백신과 치료약을 제조하는 제약회사였다.
치료제 타미플루를 생산하는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사 로슈는 지난해 3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4% 증가했다. 신종플루가 처음 발발하고 세계보건기구(WHO)가 ‘대유행’을 선언했던 지난해 2분기에는 수익이 전년 동기와 비교해 무려 12배나 증가했었다.
로슈에 라이선스를 판매한 타미플루 개발사 질리드 사이언스의 수익 역시 열 배 넘게 증가했다. 로슈사로부터 받는 로열티 액수는 2008년 4분기 1,600만달러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4분기에는 무려 1억9,410만달러로 급상승했다.
백신 제조사들의 수익 증가도 놀랍다. 노바티스의 경우 2009년 4분기 23억2,000만달러의 순이익을 올려 전년 동기 대비 54%나 상승했고,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도 2009년 4분기 8억3,500만 파운드에 이르는 판매액을 기록했다.
제약사들의 수익 증가세를 보면 “‘대유행’ 단계 선포는 (제약사 등) 연구소에게 황금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유럽연합 볼프강 보다르크 보건위원장의 말은 과장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신종플루의 위험이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에 따르면 공포를 뒤에서 조장한 이들은 제약회사들이며, 공포의 씨앗은 5년 전 조류독감(H5N1)이 인간 대 인간 감염이 가능한 독감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던 당시 이미 뿌려졌다.
당시 각국 정부는 인간 감염 독감이 발발할 경우 제약회사로부터 엄청난 분량의 치료제와 백신을 구입하겠다는 암묵적인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제약회사들이 WHO 내에 자신들의 사람을 심어 대유행 상태를 서둘러 선포하도록 로비를 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종플루 사망자가 예상을 밑돌면서 제약회사들의 봄날은 일찍 저물고 있다. 당초 모건스탠리는 GSK의 2009년 4분기 판매액을 22억파운드로 예상했지만 실제 판매액은 8억3,500만파운드에 머물렀다.
크레디트스위스퍼스트보스턴도 지난달 GSK의 주가에 대해 시장수익률 상회에서 하회로 조정하면서 “신종플루의 위험성이 과장됐다는 우려와 함께 향후 수익은 기껏해야 현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지향기자 jhchoi@hk.co.kr
■ WHO "신종플루 대유행 아직 안끝났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신종플루의 위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바이러스가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해 6월 ‘신종플루 대유행 선언’은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며, 아직 대유행 종료를 선언할 때도 아니라는 것이다.
WHO에 따르면 현재 신종플루는 북부 아프리카, 남부 아시아, 유럽 일부 국가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모로코, 알제리, 이집트에서 꾸준히 감염자가 늘고 있고,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터키에서도 감염 비율이 완만하게 높아지고 있다. 반면 미국, 일본, 중국 등은 확산세가 급속히 둔화하고 있다.
결국 서방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들의 감염률이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고 있는데다, 감염 증상도 약해지면서 치사율이 줄어 확산을 체감하고 있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가을부터 제기된 ‘북반부 대유행’경고도 아직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후쿠다 게이지 WHO 사무차장은 “올해 초 늦겨울과 초 봄에 한차례 더 대유행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반구에서도 감염자와 사망자가 더 늘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WHO는 다국적 제약회사와 연계해 신종플루의 위험을 과장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박하고 있다. 게이지 사무차장은 “지금 세계는 실제로 신종플루 대유행을 겪고 있다”며 “ ‘사기’라는 일부의 주장은 틀렸을 뿐만 아니라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계절성 독감의 치사율이 훨씬 높고, 신종플루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병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게이지 사무차장은 “둘을 비교하는 것은 오렌지를 사과에 비교하는 것과 같다”며 “계절성 독감은 (샘플을 통한) 통계적 모델로 집계를 내는데 반해, 신종플루는 실험실에서 정확히 확진을 받아야 집계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질병 예방이 목적이고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결정하지는 않는다”며 신종플루로 인한 사망자가 예상 보다 적은 것은 WHO의 대응이 그만큼 성공적이었다는 반증도 된다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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