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늦은 오후 서울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선 신작 영화 한 편이 첫 선을 보였다. 2시간 30분의 상영회가 끝난 뒤에도 관객들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앉아 감독의 연출 의도를 경청했고,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몇몇 관객들은 ‘기쁜 우리…’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 피켓을 들고 환호했고, 한 젊은 관객은 “감독님을 새 영화로 만날 수 있어 너무 감격스럽다”며 울먹였다. 유명 스타의 팬클럽 행사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었다.
배창호. ‘고래사냥’과 ‘깊고 푸른 밤’ 등으로 1980년대 한국영화 역사에 굵고 짙은 인장을 남긴 감독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엔 1990년대 어디쯤에 멈춰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꾸준히 활동해 왔다. 단지 그의 영화가 많은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지 못했고, 흥행과 거리가 멀었을 뿐이다.
배 감독이 ‘길’(2006)에 이어 4년 만에 내놓은 신작 ‘여행’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3부작 옴니버스 영화다. 대학생 커플의 상큼한 사랑이 영화의 시작을 알린 뒤 오랜 시간 떨어져 살아온 한 모녀의 가슴 아린 만남이 뒤를 잇는다. 중년 전업주부의 방황과 삶에 대한 성찰이 이야기를 닫는다.
숨쉬기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을 포착하며 감동의 잔 물결을 일으키는 영화다. 제주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해초를 인공조미료 없이 끓여서 우려낸 국물 맛처럼 맑디 맑다. “생수처럼 밋밋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소신과 맞닿아 있다.
배 감독은 “늘 생수에 정말 좋은 된장 넣고 유기농 채소 곁들여 끓여낸 듯한 영화를 하고픈 욕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정신적 식품”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식품 첨가물에 대해선 다들 신경을 굉장히 쓰면서도 영화에 대한 인식은 그렇지 않다. 국내 투자배급사들이 유익하면서도 맛 있는 영화에 대한 인식을 깊이 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사실 자극적인 양념이라면 1980년대 초반 그를 따라잡을 자가 없었다. “‘적도의 꽃’ 등 짧은 기간에 여러 흥행작을 만들어내며 맵고 짜고 새콤한 양념을 섞었던” 그는 1986년 ‘황진이’를 영화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았다. 빠른 이야기 전개 대신 느린 화법을 택한 ‘황진이’는 대중과 거리가 먼 작가주의 감독으로 그의 위치를 재정립시켰다.
“1982년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 때부터 담백한 영화를 찍고 싶었다. 적응 기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흥행작들을 만들며 양념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중과 영합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좋아하고 투자자는 돈을 벌 수 있는 영화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찰나적인 쾌감에 집착하는 영화들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 그는 “3D(입체)영화에 대해 비판적이진 않지만 미래의 주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했다. “우리의 눈만 홀리고 즐겁게만 하는 영화는 영혼과 정서가 담긴 깊이 있는 내용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튀는 자극적인 영화들만이 환호성을 얻는 이 시대, 그는 후배들에게 영화의 본령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요즘 젊은 감독들은 창의적인 능력에선 아주 탁월한 점이 많다. 그들의 표현력과 관찰력, 추진력에도 자주 감탄한다. 그러나 인간을 보는 시각이 아쉽다. 인간이 지닌 어두운 면을 너무 부각시킨다. 그게 요즘의 경향이란 생각에 나도 한때 영화하기가 두려웠다. 밝은 면을 찍어도 경박하고 천박하다. 그런 시각을 바꾸면 좀 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영화가 나올 텐데…”
그는 1978년 현대종합상사의 케냐 지사장으로 일하던 시절 잉태한 시나리오가 필름이라는 육체를 얻기를 꿈꾼다. 케냐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한국 의사에 대한 휴먼 스토리다. “이미 헌팅을 두 번이나 다녀왔고 빨리 뱃속에서 빼내고 싶지만 현실과 타협하진 않겠다”고 했다.
‘고래 사냥’ 등을 통해 유독 길에 대한 사유에 매달려온 그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읊조렸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택한 길을 걷다가 문득 풀이 무성한 길로 접어든 그의 종착지는 과연 어디일까. 그의 신작 ‘여행’은 3월 개봉 예정이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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