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저녁 7시 서울역 대회의실. 다양한 직군과 연령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회의실 앞에 내걸린 플래카드에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인생 2막 귀농열차에 탑승하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귀농열차에 몸을 실으려는 이들에 대한 사전 교육의 장이었다. 이들은 왜 귀농열차를 타려는 것일까.
농촌진흥청이 주최한 제1기 직장인 야간 귀농교육 첫 날인 이날 70석의 강의실은 강의 시작 전에 꽉 들어찼다. 드디어 '전원생활과 농지구입 활용'이라는 주제로 첫 강의가 시작됐다. "땅값은 여러분들을 마냥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퇴직 후 귀농을 생각하고 있다면 지금, 바로, 당장 시작하십시오. 10년 뒤, 여러분이 은퇴할 즈음 준비하면 그땐 너무 늦습니다." 주말 저녁, 누적된 피로에 지칠 법도 했지만 강의가 이어진 3시간 내내 참석자들의 눈빛은 반짝였다. 강사의 말 한마디를 놓칠세라 펜을 든 손도 분주히 움직였다.
강의에 참석한 이들은 대학교수, 공무원, 대기업 임원, 은행 직원, 가정 주부 등 다양했다. 연령도 30대에서 60대까지 천차만별. 공통점이 있다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농촌에서 인생 2막을 펼치려는 예비 귀농자라는 점이다.
중소기업 임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A(47)씨. 팍팍한 도시생활보다 여유로운 농촌생활을 누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2년 남짓 주말농장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이 아토피의 악몽에서 벗어났다"며 "가족 모두가 농촌생활을 즐기고 있는 만큼 퇴직 전이라도 귀농할 요량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금융계에 종사하고 있는 B(52)씨는 은퇴 준비를 위해 귀농열차에 탑승한 경우. "한창 일할 나이이지만 퇴직 압력이 높아지면서 부담감이 적지 않아요. 그렇다고 창업을 하거나 다른 새로운 일에 도전할 자신감도 없고…." 하지만 아직 가족들에게는 그의 귀농 계획을 말하지 못했다.
적지 않은 반대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귀농교육 등을 통해서 구체적인 결심이 서게 되면 털어놓고 협조를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반면 부부가 함께 귀농교육에 참가한 경우도 있었다. 대학교수인 남편 C씨는 "대학 방학을 이용해서 강의 신청을 하게 됐다"며 "직접 심어서 키운 농산물을 먹고 지역사회에 봉사하면서 노후생활을 보내고 싶어서 귀농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수강생 중에서 가장 젊은 조성휘(36)씨는 귀농 계획이 꽤 구체적이다. 버섯, 약초 등 특용작물을 재배하겠다는 계획이다. 지금 한 중소기업 과장으로 재직 중이지만, 잘만하면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충만해 보였다. 늦어도 4, 5년 내 귀농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 교육에 대한 걱정도 덜어버린 듯했다. 조씨는 "정보기술(IT)이 발달하면서 시골에서도 도시 못지않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만큼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키워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했다.
귀농교육이 있다는 소식에 지방자지단체장들도 특강을 자처했다. 고령화, 공동화 등으로 활력을 잃고 있는 농촌에 젊은 이들을 유치하는 것만큼 절실한 문제가 없기 때문. 이날은 한동수 경북 청송군수가 강사로 나섰다.
"공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고, 기후 좋은 청송에서 사과 5,000평만 가꾸십시오. 여러분도 억대 소득의 농민이 될 수 있습니다. 땅값도 싸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아파트만 팔아도 모든 게 해결됩니다."
이번 교육에 참석자들이 보인 귀농에 대한 관심은 주최 측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행사를 준비한 농촌진흥청은 기수 별로 50명씩 4기수 총 200명을 모집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워낙 많은 인원이 몰리면서 기수당 70여명씩 280명 규모로 늘려야 했다.
기수마다 3시간씩 현장 교육을 포함해 5차례 교육이 이뤄질 예정. 김재수 청장은 "귀농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뜨거운 줄 몰랐다"고 했다.
실제 귀농인 수는 2003년부터 완만한 증가 추세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연 6,000가구 이상으로 급증했다가 한동안 700~1,000가구 수준으로 감소했으나 최근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귀농 이유도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송용섭 농진청 지도개발과장은 "외환위기 직후에는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농촌을 택하는 '생계형 귀농'이었다면 최근의 귀농 붐은 농촌에서 자연과 소통하면서 내면의 행복을 찾는 '생태적 귀농'이 주를 이룬다"라고 말했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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