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이 파라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 빛이 불붙는 듯하다.
올 봄이 보건대는 또 지나가나니/ 어느 날이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해인고.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무제(無題)시 두 수 가운데 둘째 '절구(絶句)'로, 안록산의 난리에 피난하던 성도(成都)에서 지은 명편이다. 색채를 곁들여 기교를 다 한 시화(詩畵)는 아름다운 봄 경치에서 일어난 느낌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또 지나가는" 봄에 머물렀다. 일찍이 육당(六堂)이 시조로 옮겨 "강산이 때를 만나 푸른빛이 새로우니/ 물가엔 새 더 희고 산에 핀 꽃 불이 붙네/ 올 봄도 그냥 지낼 사 돌아 언제 갈거나"라 읊었고(이병주 <두시언해비주> 참조), 미당의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고 한 시상은 이 시의 "또 지나가나니"를 연상시킨다. 두시언해비주>
두시는 중국에서도 성당기(盛唐期)의 정점으로 평가되었고, 아예 시 공부의 모범으로 여겨진 송(宋)나라의 전통이 과거제도와 함께 고려조에 전해져서, 조선 시단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특히 두시에 관한 시험문제가 많이 나왔는데, 이퇴계(李退溪)도 두시를 논평하라는 과제를 '시사(詩史)'의 뜻으로 해석하여 급제했다. 두시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시 공부와 시험 문제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문학작품이리라.
언해 사업을 주도한 조위(曺偉)의 <두시언해 서문> ((1481)에서도 시를 공부하고자 하면서도 두보를 어렵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석을 달고 언해를 한다고 했다. 훈민정음 창제 뒤 조선조의 언해(諺解) 사업은 불경과 유교경전에 이어, 두시 거의 전부를 언해하여 《두시언해》27권 17책으로 중간(重刊)하는 대사업으로 150년 간 이어졌다. 두시언해>
게다가 두시는 높은 주제의식과 정치한 용사(用事), 박력 있는 시격(詩格)과 전쟁의 체험으로 인간의 근원적 비애를 흉내낼 수 없는 경지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의 두시 수용은 한국문학사에서 그대로 중국문학을 대표했다. 이것은 일본의 한문학이 백락천(白樂天)의 독무대였다는 사실과 크게 대비된다. 일본의 백시(白詩) 편향은 평명한 말과 불교에 호의적인 시풍이 일본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라 한다.
수백 년간 일본문학의 교과서였다는 <화한낭영집(和漢朗泳集)> 에 실린 중국 한시 234수 가운데 백락천의 시가 139편으로 두 번째인 원진(元稹.11편)을 크게 따돌리고, 이태백이나 두보의 시는 한 편도 뽑지 않았을 정도였다. 화한낭영집(和漢朗泳集)>
이런 한시 수용의 차이는 백시(白詩)의 낭만시와 두시의 사회시를 선호한 두 나라의 문학적 기호 밖에도, 과거제도의 유무라는 문학 사회학적 환경이 크게 관련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연전에 두보초당(杜甫草堂)을 방문한 감흥은 시 한편 제대로 못 쓰는 나로서도 우리 문학사 속에 살아있는 두시 수용의 전통을 실감케 하는 체험이었다. 더구나 60년 떠돈 봄이 보건대는 또 지나가는데,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봄은 어느 봄이란 말인가?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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