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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2> '서울역 회군' 비난은 무책임의 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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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2> '서울역 회군' 비난은 무책임의 소치

입력
2010.02.01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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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들어 약간씩 움직이던 학생들이 5월초에야 거리로 나서기 시작해 5월 10일경부터는 서울시내 주요거리를 학생들의 시위대가 휩쓸 정도가 되었고, 민주화운동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즈음 나는 국민대회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국민연합은 5월 19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시·도청 소재지에서 계엄해제와 신군부 퇴진 및 민주화를 촉구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고 '민주화를 위한 국민행동 강령'을 발표키로 했다.

8개항의 이 국민행동강령에는 국민의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계엄군의 부당한 명령 거부 같은 것도 있었다. 김대중 공동의장은 계엄군의 명령 거부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전국적인 동시다발 집회를 반대했다.

결국 문익환 목사, 예춘호 씨 등이 나서서 설득한 끝에 국민행동강령에서 계엄군의 명령 거부 항목은 빼기로 하고, 국민대회를 5월 21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런데 학생들의 시위가 치열해져 5월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10만 명 이상의 학생이 결집해 '계엄 해제''전두환 퇴진' 을 외쳤는데 실로 장관이었다. 이날 저녁 학생지도부는 이 집회를 더 이상 끌고 가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하여 각 대학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함으로써 해산하였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운동권 인사들은 '서울역 회군'이라 부르면서 당시의 학생지도부가 과오를 범했다고 비난한다. 즉 이날 서울역 집회를 해산하지 말고 신군부의 계엄군에 맞서 싸워 민주화를 쟁취했어야 한다는 거다.

내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우선 서울역 '회군'이란 말부터가 적절치 못하다. 학생들이 군인도 아니거니와 계엄군과 '전쟁'을 하기 위해 서울역에 모인 것도 아니었다. 학생들은 민주화 탄압세력과 맞붙어 '투쟁'은 하지만, 이것은 국민적 정당성을 내외에 선전하고 국민의 참여를 독려키 위한 것일 뿐 민주화 탄압세력과 '전쟁'을 벌여 쳐부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민주화운동은 '투쟁'이지 '전쟁'은 아니다.

다만 이런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10만 명이 넘는 학생이 서울 한복판에 집결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 힘과 기회를 민주화를 위해 크게 활용할 수 있었어야 한다. 즉 정부당국에 일정 시점까지 민주화조치를 취하라는 단호한 요구, 그리고 야당의 정치지도자, 국민, 학생들에 대한 의미 있는 메시지 전달 등이 있었다면 좋았을 거다. 형식적인 주장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속에 각인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학생들의 집회 해산을 비난하는 것은 본말의 전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학생들이 이날 서울역 집회를 해산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이 집회가 국민적 대표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적 대표성을 가진 인사나 단체가 이 대회를 주최하고 주도했어야 하며 학생들만이 아니라 다수 국민이 이 집회에 참여했어야 한다.

한마디 덧붙이면 학생들의 투쟁이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화의 희망과 열정, 그리고 확신이 팽배해 있어야 한다. 물론 학생들의 민주화투쟁이 이런 희망과 열정 및 확신을 촉진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1980년 봄에는 이런 희망과 열정, 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국민적 차원의 정치지도자였던, 더욱이 평생 민주화를 위해 애써왔다는 김대중·김영삼 양 김 씨가 민주화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인데도 개인적인 권력욕에 집착한 모습으로 국민대중에게 비쳐지고 있었다.

1970년 5월 17일. 마침내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와 함께 쿠데타를 감행했다. 김대중 씨와 문익환 목사 등 수많은 민주인사를 구속하고 김영삼 씨는 가택에 연금하면서 온갖 반민주적인 조치를 단행했는데, 이 모든 일은 이미 알려져 있는 대로다.

그런데 5.17쿠데타가 일어나고서 '올 것이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절대로 오지 말았어야 할 일이 왔는데도 '올 것이 왔다'는 말이 많았던 것은 민주세력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양 김 씨의 잘못된 대응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거니와 사회 각 부문의 지식인들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나를 포함한 재야인사들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학생들도 신군부의 집권음모가 한창 진행 중이던 3월과 4월 허송세월했다. 한마디로 국민의 민주역량이 미흡했다.

나는 5월 17일 밤 국민대회 일로 해위 선생 집에 있었다. 저녁식사 후 정세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전화로 해위 선생에게 쿠데타가 일어난 것 같다고 알려왔다.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에서 회의를 열고 있었는데 군인湧?회의장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체포했다는 거였다.

나는 그날 밤 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구 집에 가서 잤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보니 '계엄령 전국 확대'란 표제 아래 김대중 씨 체포 등 신군부의 쿠데타를 알리는 뉴스들이 어지럽게 보도되어 있었다. 거리에는 이미 군인과 경찰이 물샐 틈 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정말 허탈감이 밀려왔다.

박정희 독재를 끝장내기 위해 그 많은 투쟁을 전개해 왔고, 그래서 마침내 독재자 박정희가 제거되었는데도, 이것을 민주화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거꾸로 민주세력이 감옥에 갇히게 되다니! 더욱이 민주세력의 무능도 한 요인이어서 더 허탈했다.

그런데 '광주사태'라는 더 큰 문제가 들이닥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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