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전경린(48ㆍ사진)씨가 8번째 장편 <풀밭 위의 식사> (문학동네 발행)를 냈다. 상처 입은 존재들을 넉넉히 끌어안는 새로운 가족상을 보여준 장편 <엄마의 집> 이후 2년여 만에 발표하는 이 장편에서 전씨는 등단 이후 줄곧 매달려온, 관습과 제도를 거부하는 불온한 사랑의 욕망이란 주제를 다시금 형상화한다. 엄마의> 풀밭>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마네의 대표작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에서 전씨는 사랑에 관해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인식을 보여준다. 그의 예전 장편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1999), <유리로 만든 배> (2001) 등에서 사랑은 환멸의 과정이었다. 이들 작품 속 여주인공들은 욕망에 이끌려 일상을 과감히 탈주하지만 결국 사랑의 본질을 회의하며 파국을 맞았다. 유리로> 내>
하지만 이번 작품의 주인공 누경은 육촌 오빠와 금지된 사랑의 열병을 앓은 뒤 비로소 어린 날의 정신적 상처를 딛고 삶과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한다. 그것은 "우리가 격정의 엄습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안간힘을 다해 현재를 제어하려는 아둔하고 흐릿하고 가냘픈 의식의 줄타기뿐"(243쪽)이라는 체념 혹은 달관이다.
누경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과 알몸으로 망중한을 즐기는,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속 여성에 자기를 빗대 생의 의지를 다진다. "한 겹 한 겹 남김없이 탈피할게요. 놀라지 말아요. 자 이제, 나를 보세요. 풀밭의 외기에 맨몸을 맡기고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나를요. 아무것도 피하지 않는 평온한 내 눈을 보세요."(247쪽) 전씨는 "'풀밭 위의 식사'가 의미하는, 상처를 간직한 역설적인 평온과 태연을 주인공에게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스무 살 터울의 육촌 오빠 서강주와 불륜에 빠지는 30대 중반 누경의 직업은 유리공예가. 굳으면 산산조각으로 깨지기 쉽지만 다시 열을 가해주면 녹아서 액체가 되는 유리의 속성이 작가가 말하려는 주제와 절묘하게 부합한다. 매끄럽게 조탁된 필치, 감각적 비유가 돋보이는 '전경린표 문장'도 여전하다. 가령 이런 문장. "누경의 숨소리는 보풀이 인 낡은 스웨터의 실을 당겨 푸는 것만 같은 소리였다."(13쪽)
이훈성 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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