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팔렸어요." 그 여자는 표정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다가 덜컥, 목에 큰 생선가시가 걸린 듯 정신이 혼미해진다. "금요일에 이사 가요." 나는 한참 후에야 '그 여자네 집'이 팔렸고, 오는 금요일에 이사를 간다는 말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 예. 이사 준비로 바쁘시겠네요."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오는 것이라고 인생이란 길을 걸으며 수없이 연습해왔다. 그 결과 얼굴과 목소리는 담담하게 연기할 줄 알게 되었으나 마음은 여전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밭이어서, 생소금을 뿌린 듯 이내 아파온다. 용택 형의 시 '그 여자네 집'처럼 내 가슴 속에 감춰뒀던 그 여자네 집. 은현리 옆 마을 고연리, 긴 설유화(雪有花) 울타리를 가진 그 집. 설유화 하얀 꽃이 피면 아아, 사월에 눈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찾아온 듯 가슴이 마구 뛰던 집.
마당에서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 사이 할미꽃이 피었다 지고 꽃향기가 천 리 만 리 간다는 키 작은 서향나무 한 그루와 해를 따라 피는 노란 수선화 꽃밭. 기다렸다는 듯이 갖가지 꽃이 피는 봄밤이면 좋은 친구와 둥그렇게 모여앉아 '꽃밥'을 비벼먹던, 그 여자네 집이 팔렸다. 내 마음에서 집 한 채가 또 빠져나간다. 나무와 꽃이 뿌리째 사라진다. 이사보다 먼저 그 여자네 집이 와르르 무너진다. 오래 아플 것 같다.
시인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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