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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 야만의 시간, 그들은 공을 차며 절망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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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 야만의 시간, 그들은 공을 차며 절망과 싸웠다

입력
2010.01.31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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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코어, 마빈 클로스 지음ㆍ박영록 옮김/생각의나무 발행ㆍ388쪽ㆍ1만3,000원

영국에서는 '뷰티풀 게임'이라는 말이 곧 축구를 뜻한다. 축구황제 펠레의 자서전 제목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가장 거칠고 단순하고 원시적인 이 스포츠와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그러나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축구가 품고 있는 열정과 에너지가 때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2002년에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다시 월드컵의 해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 만들어낼 수많은 아름다운 게임들에 앞서 축구를 소재로 한 가슴 뭉클한 논픽션 한 편이 먼저 찾아왔다. 넬슨 만델라가 18년 동안 수감됐던 곳이자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징적 공간인 남아공의 로벤섬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실화를 미국의 역사학자가 되살려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다 로벤섬 수용소에 끌려온 정치범들은 축구를 했다. 단순히 여가시간에 공을 찬 것이 아니었다. 6m 높이의 철조망 안에서 수감자들은 흑인 영웅의 이름을 딴 마카나축구협회를 1966년 설립했고, 1990년 교도소가 폐쇄될 때까지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한 체계적인 축구 리그를 운영했다.

폭력과 차별이 난무하던 교도소에서 처음부터 축구가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셔츠를 뭉쳐 만든 공으로 간수 몰래 감방 안에서 축구를 하던 수감자들은 3년에 걸친 끈질긴 투쟁 끝에 축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과 적십자사의 압력에 교도소 측이 굴복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무 널빤지와 해안으로 떠밀려온 그물로 골대를 만들었고, 타이어를 자르고 못질해 스파이크를 만들었다. 교도관 몰래 황무지에 물을 뿌려 녹색 운동장으로 바꿔나갔다. 채석장에서 고된 노동을 마친 후 감방 안에서 체력 훈련과 기술 연습을 했다. 각기 다른 성향의 정치 조직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댄 채 룰을 정하고 위원회를 꾸렸다. 모든 기록은 꼼꼼하게 문서로 남겼다. 레인저스와 벅스라는 이름의 두 팀으로 출발한 축구는 어느새 3부 리그로 확대됐고, 리그 경기뿐 아니라 컵 대회와 친선경기까지 열렸다. 명문 구단과 스타플레이어가 나왔고, 일반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까지 서서히 응원단에 합류했다.

위기도 있었다. 1970년 심판의 오심으로 패한 레이더스팀 선수들이 격분한 나머지 상대의 다음 경기를 방해하면서 리그가 중단된 것이다. 징계위원회와 선수들 간의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지만 그들은 5개월 동안 수많은 공청회를 열어 합의를 도출해냈다. 그들 자신이 안정과 분쟁해결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아파르트헤이트의 희생자들이었기에, 공정한 재판과 합법적 절차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로벤섬에서 축구 선수나 심판, 혹은 행정가로 활약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훗날 남아공의 지도자가 됐다. 레인저스 FC 주장이었던 제이컵 주마는 지금 남아공 대통령이다. 마카나축구협회 초대 회장이었던 딕강 모세네케는 헌법재판소 부소장이 됐다. 협회의 응급치료위원회를 맡았던 세딕 아이잭스는 국제의료정보학협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수감자들에게 축구는 야만적 환경을 견디게 하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다. 인권과 존엄성을 되찾는 도구였으며, 각기 다른 정치 노선의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투쟁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자기 자신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든 간에, 노래는 묻혀버리고 역사는 사라질 것이다." 수감번호 501/63으로 기록된 수감자 안토니 수즈가 남긴 말이다. 그들에게 축구는 곧 '자기 자신의 노래'였다.

이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 은 축구와 스포츠를 통해 하나가 된 사람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줄곧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축구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는 게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저 축구를 진심으로 즐겼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겠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재미있다.

마카나축구협회 초창기 멤버들과의 인터뷰, 그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을 토대로 한 이 책의 원제는 '단순한 게임 이상의 것(More than just a game)'. 같은 제목의 다큐영화로 만들어져 남아공월드컵 예선 추첨행사 때 상영되기도 했다.

김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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