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를 내려놓는 탈레반 저항세력에 땅과 일자리를 주겠다."28일 런던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지원국 회의에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제시한 회유책이다. 이념적 충성심이 약한 탈레반 하부조직을 그렇게 유인해 탈레반 세력 약화와 정세 안정을 꾀한다는 구상이다. 탈레반 집권시절 고위직과 지방수령 등을 지낸 이들을 테러지원 블랙리스트에서 제외, 다시 기용하는 정치적 화해 방안도 내놓았다. 카르자이는 이와 함께 필요한 자금을 대줄 것을 지원국들에 호소했다. 회의를 주재한 브라운 영국 총리 등도 이름하여'평화통합신탁기금'에 돈을 낼 것을 각국에 재촉했다.
■당초 카르자이는 5억 달러를 요구했으나 합의된 기여금은 모두 1억4,000만 달러 수준이다. 일본이 5,000만 달러를 약속한 것이 가장 많다. 영국은 1,000만 달러에 못 미치고, 미국은 국내법의 제약을 앞세워 지원을 유보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기금은'탈레반 신탁기금'으로 불린다. 영국의 보수지 더 타임스는 진작에 "5억 달러로 탈레반 매수"라고 제목을 붙였다. 뉴욕타임스는 일찍이 영국이 바이킹의 침략과 약탈을 피하기 위해 덴마크 왕에게 막대한 은(銀)을 공물(貢物)로 바친 치욕적인'데인겔드(Danegeld)'에 비유했다.
■그러나 탈레반 매수는 오래 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나토 동맹군의 이탈리아 지휘관 등이 탈레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뒷돈을 건넨 스캔들이 심심찮게 보도됐다. 미군도 탈레반 주류와 이해 갈등을 보이는 부족을 꾀어 우호세력으로 삼기 위해 거액을 '지역발전기금'으로 쥐어주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8일 아프간 동부의 신와리 부족이 전향하는 대가로 미군이 직접 부족장에게 100만 달러를 주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테러 세력과의 어떤 거래도 거부한다는 공식 정책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매수자금이 15억 달러에 이른다는 보도도 있다.
■19세기 이 지역 패권을 다툰 영국과 러시아는 전투보다 적대적 부족의 매수 공작에 주력했다. 2001년 아프간을 침공한 미국도 영국의 경험을 빌려 탈레반의 파슈툰 족과 적대적인 타지크 족 등의 북부동맹을 매수해 선봉에 내세웠다. 이런 역사에 비춰 미국과 나토가 노골적인 탈레반 매수에 나선 것도 전통적인 아프간 경략, 점령통치의 방책으로 봐야 옳지 않을까 싶다. 정세를 안정시켜 조기 철군을 도모한다는 명분은 8년간 3,000억 달러를 전쟁비용으로 쏟아 부은 사실을 상기할 때 곧이 듣기 어렵다는 관측이 많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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