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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겨울 강변의 비박, 달빛 아래 얼음 강… 황홀한 추억이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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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겨울 강변의 비박, 달빛 아래 얼음 강… 황홀한 추억이 피어오른다

입력
2010.01.2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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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동설한에 꽁꽁 언 강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하면 정신 나갔다는 소리를 들을 게 틀림없다. 나 역시 그랬다. 두껍게 얼어붙은 겨울 강의 얼음 위에서 비박(텐트를 사용하지 않는 일체의 노영)을 하다니. 하지만 "정말 황홀한 추억"이라는 가까운 동료의 얼음 비박 체험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더구나 그가 밤을 지샌 강은 주천강이 아니던가.

한때 방랑벽이 도져 영월, 정선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 그 초입에 있는 주천강의 아름다움에 반한 적이 있다. 눈과 강이 붙어 하얀 빙원을 이룬 그곳에서 달빛을 받으며 밤을 지새고 얼음 트레킹까지 한다면 겨울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주천강 하면 흔히 강원 영월군을 떠올리지만 찾아간 곳은 강원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였다. 주천강은 횡성군 둔내면 태기산에서 시작해 이곳 강림면을 거쳐 영월로 흘러간다. 1월 초ㆍ중순 기온이 영하 30도에 근접한 혹한지역이지만 내가 동료와 함께 찾아간 날은 추위가 한껏 누그러져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겨울 강은 외롭다. 시린 얼음이 수면을 덮고 강 옆 산도, 언덕도 눈에 덮여 있다. 인적 끊긴 이곳에서 그나마 생명체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눈에 박힌 야생동물의 발자국뿐이다. "끄억"하는 고라니의 답답한 울음마저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찾아간 시간이 밤 9시가 넘었으니 겨울 강은 더 더욱 쓸쓸했다. 지금 강에는 우리 일행 말고 아무도 없다. 차량의 빛 하나 들어오지 않고 비행기의 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인위적인 빛이 하나도 없는 그곳에서 길잡이를 한 것은 밤 하늘의 달과 별이었다. 산 위로 떠오른 반달에 강의 줄기가 수줍은 듯 자태를 보여주었다. 현란한 인공 조명이 지배하는 도시에서는 반달의 저 빛이 초라하고 궁색하겠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아름답고 은은하며 부드러운 자연조명이다. 사람 없는 강에 와서야 반달이 이렇게 환한 줄 알았다.

하늘에는 웬 별이 이렇게 많은가.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큰개자리, 작은개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마차부자리 그리고 북극성…얼마 전 덕유산 삿갓골에서 보았던 그 많은 별이 이곳 주천강의 까만 밤하늘에도 그대로 박혀 있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그 별들을 손으로 하나씩 세며, 어렸을 적 학교에서 별자리를 배운 뒤 밤 하늘에서 그 별을 찾던 기억을 떠올린다.

애초 우리는 전등을 켜고 강 얼음 위를 1㎞ 정도 걸어가 비박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근 며칠 기온이 올라가고 비까지 제법 많이 내려 수량이 크게 늘어나 있었다. 수면은 아직 대부분 얼어 있었지만 그래도 강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는 것으로 보아 얼음 위에서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불어난 강물에 휩쓸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게다가 지금은 깜깜한 밤이다.

얼음 강 비박을 모래톱 비박으로 대체하기로 하니 아쉬움은 남아도 안심은 된다. 삭정이로 불 피우고 추위를 녹이며 일행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탁탁" 하며 얼음 터지는 소리에 귀를 쫑긋한다. 가끔 "와장창" 얼음 꺼지는 소리도 들렸다. 강폭은 일정한데 얼음이 얼면서 부피가 커지다 보니 금이 가고 내려 앉는 것이다. 기온이 더 낮고 강이 더 단단히 얼었다면 지금쯤 얼음이 덩어리째 길게 쪼개지면서 청량하면서도 여운 깊은 "쩡" 소리를 강에 메아리 치게 했을 지 모른다. 그 소리, 10여 년 전 홍천강에서 들은 적이 있다. 흩어진 마음을 모아주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소리였다. 얼음이 부피를 더하고 녹으며 내는 "탁탁"또는 "와장창" 소리가 "쩡" 소리보다 청각적 자극이 덜할지는 몰라도 겨울 강이 뜻밖에 부산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겨울 강이 외롭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달빛과 별빛에 젖고 얼음 터지는 소리에 취하며 2년 전 이곳에서 달빛 얼음 트레킹을 한 뒤 "내 생애 가장 길고 진한 밤"이라고 쓴 회사 동료의 감각적이고 유쾌한 체험기를 다시 떠올렸다.

삭정이의 빨간 불꽃이 사윌 무렵 잠자리를 마련했다. 함께 한 일행은 달빛과 별빛을 받고 싶다며 매트 깔고 침낭에 들어가 하늘을 보며 자리에 들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작은 1인용 텐트에 들어가 누웠다. 플라이는 따로 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밤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얇은 텐트 천을 투과해 내 눈에 들어왔다. 잊을 수 없는 황홀한 밤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동료는 나보다 더 아름답게 잠에 들었다고 고백했다. "침낭에 들어 하늘을 보았는데 별똥이 떨어졌어요. 혹시 하나 더 떨어지려나 하고 하늘을 보았더니 얇은 구름이 커튼처럼 하늘을 가렸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어요. 새벽녘에는 하얀 눈이 얼굴을 적셔 잠에서 깼어요. 미칠 것 같은 밤이었습니다."

겨울 강의 얼음에서 추위를 이겨가며 잠만 잤다면 혹한에 도전하는 열혈아라거나 기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우리가 만난 것은 별과 달과 강과 얼음이 보내주는 빛과 소리였다. 극한 체험을 한 게 아니라 잠시나마 자연의 일부가 된 듯 했다. 우리는 그것을 겨울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호사라고 믿었고 평생 추억이 될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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