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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남녀] '손끝'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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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남녀] '손끝'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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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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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레시피(recipe)'다. 환상적인 사진이나 이색적인 맛의 요리라는 카피에 앞서 얼만큼 정확한 레시피를 담은 책인가에서 독자들의 반응이 갈리게 된다.

요리책을 당장 따라 해봤을 때 얼추 비슷한 맛과 그림이 나와야 정확한 레시피다.

그런데 종종 큰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들 가운데 레시피가 없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수년 전 취재차 만났던 중국인 조리장도 그랬다.

내 얼굴만한 국자 하나로 고추기름, 각종 장, 설탕, 소금, 후추, 육수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볶고 끓이고 지지던 조리장은 레시피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큰 국자로 십여 가지 요리를 다 만드냐고 놀라 물었더니 "이 국자가 내 손이고, 국자가 내 마음을 읽어서 국자에만 집중하면 마음 먹은 요리가 나온다"는, '반지의 제왕'같은 대답을 했다. 내 마음을 읽는 국자가 있으면 레시피가 필요 없는 것일까?

'달인'급의 손맛을 자랑하는 할머니, 엄마, 시어머니 역시 모두 레시피가 필요 없는 분들이다. 각종 이북음식이며 아작아작 씹히는 맛의 깍두기, 동치미, 나물을 기막히게 요리하시는 우리 할머니는 손끝에 계량 컵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자랑의 자랑을 하는 울 엄마의 솜씨는 말할 것도 없이 '노 레시피'다. 엄마는 눈으로, 향기로 '절대 간'을 맞춘다.

서울식, 이북식 요리를 선보이는 울 엄마에 비해 시어머님의 요리는 좀 더 진하다. 남도 간으로 요리하시는 시어머님의 김치며 무말랭이, 각종 젓갈에 우거지를 잔뜩 넣어 푹푹 찌듯 끓여내는 찌개는 한 입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요리. 내가 양념 공식을 여쭈면 "그런 것 몰라"라고 답하신다.

요리 초보자라면 레시피가 필요하다. 정확한 레시피대로 따박따박 요리하다 보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레시피대로 만드는 요리는 2%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 레시피가 설탕을 넣으라 할 때 그 대신 향기가 화려한 아카시아 꿀을 넣어보는 재치, 레시피가 고구마를 넣으라 했지만 단호박으로 바꿔 노란 색을 덧입히는 센스, 레시피는 센 불로 10분이라 했지만 센 불로 7분, 중간불로 5분을 끓여보는 도전정신이 나머지 2%의 매력을 만들어 낸다.

가끔 우리 사는 일상에도 레시피가 있다면 서로 무례할 일도 없고, 실수도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발견한 헌책방이 나의 아지트가 될 때면 '노 레시피'라서 인생이 더 매력적인 맛을 내는가 생각하며 웃게 된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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