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강을 한 번이라도 거쳐간 사람이라면 그 아름다운 강변 풍경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술 솟는 샘 주천(酒泉)에서 유래한 강 이름도 예사롭지 않지만, 강원 영서 지방의 오지를 감아 돌며 만들어낸 서정적인 경치와, 그곳 사람들이 만든 삶의 문화가 여행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매서운 혹한이 몰아친 이번 겨울 주천강에는 얼음세상이 펼쳐졌다. 하류에서는 강물이 세차게 흘렀지만 중상류는 대부분 얼음으로 덮여 있다. 그 얼음을 걷는 것은 강에 몸을 맡기고 몸으로 강을 느끼는 것이다.
얼음 트레킹을 시작한 곳은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의 한적한 강변이었다. 얕은 산길을 넘어야 도착하는 그곳은 마을과 단절됐고 인가도 없다. 하얀 눈과 얼음이, 검은색 나는 앙상한 나무와 대비되면서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강 풍경은 흑백의 동양화 같다.
인근의 사설 천문대인 천문인마을의 정병호 천문대장이 등산용 스틱으로 얼음을 두드리며 우리를 이끈다. 그는 교양, 낭만, 사회의식을 함께 갖춘 순수 자연인이다. 정 대장이 얼음에 발을 딛는 순간 "쨍그랑" 소리가 났다. 얼음이 산산조각 나며 낸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를 따라 얼음을 밟았더니 같은 소리가 강변을 울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얼음이 깨졌다고 바로 아래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얇은 얼음 밑으로 얼음 층이 또 있으며 그 아래로 또 다른 겹의 얼음이 있다. 그 얼음 층이 한번에 모두 깨지지 않는 한 얼음 아래의 물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얼음이 깨지고 무릎까지 쑥 들어갈 때는 겁이 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얼음 깨지는 소리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꼭 발로 유리를 밟아 깨는 것 같은 소리다. 일부러 얇은 얼음을 밟아 나갔더니 쨍그랑 소리가, 강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이어진 산 줄기를 따라 메아리 친다. 메아리의 여운이 아직 살아있을 때 또 다른 메아리가 겹치니 합창 소리라도 되는 것 같다. 반면 얼음이 단단하고 매끄러워 보이면 엉거주춤 조심스럽게 걷게 된다. 그러다가 가속의 힘으로 쭉 미끄러지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얼음이 어느 정도 얼었는지는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와 색깔로 대강 알 수 있다. 가볍고 빈 소리가 나면 깨지기 쉽지만 둔탁한 소리가 나면 단단하게 언 것이다. 지나치게 하야면 깨지기 쉽고, 하얗기는 하되 약간 빛이 바랬으면 깨지지 않는다.
강심에는 얼음 녹은 곳이 적지 않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내려다 보면 시퍼런 강물이 빠르게 흘러간다. 수심도 깊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강폭은 넓고 수량이 많다. 우람하고 매끄러운 바위가 자태를 더하면서 더더욱 진경이다.
출발지에서 2㎞ 정도 내려간 뒤 아쉬움 속에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행정구역 역시 월현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추위가 계속되고 얼음이 잘 얼었다면 당연히 영월까지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강에서 나와 산판 길 따라 출발지점으로 돌아왔다. 아직 잔설이 많아 발로 전해지는 촉감이 푹신했다.
주천강 얼음 트레킹은 비밀스러운 여행이다. 알음알음 아는 사람끼리 나누는 은밀한 체험이다. 이렇게 기사를 쓰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 그래서 조심스럽다.
트레킹을 마친 뒤 최근 뚫린 터널을 지나 영월군으로 발길을 돌릴만하다. 주천강이 길과 나란히 흐르고 무릉리, 도원리 등 정겨운 마을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무릉리의 요선정에서는 소나무 사이로 주천강을 내려다볼 수 있다. 신선이 놀았다는 이름처럼 선경이 따로 없다.
횡성=글·사진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