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베일 속에 가려, 언제나 숱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며 애를 태웠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어김없이 그를 향했다.
스티브잡스 최고경영자(CEO)가 애플의 생태계를 이어갈 '센 놈'(아이패드)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잡스 스스로가 '내 생애의 최고의 작품'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면서 말이다. 수많은 히트 상품만을 탄생시키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995년 '미혼모의 아들'로 세상에 나온 그는 부모에게 버려진 채 가난한 노동자 집안으로 입양됐다. 어렵게 대학에 입학했지만 학비가 없어 그나마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우여곡절끝에 찾은 일자리는 중소 비디오 게임 업체 프로그래머. 하지만 이 직업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잡스는 당시 아마추어 컴퓨터(PC) 모임에서 휴렛팩커드(HP)의 인재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다.
'새로운 사업 도전'이란 공감대를 형성한 둘은 회사 이름을 애플(1976년)로 정하고, 1977년 마침내 세계 최초의 개인용 PC인 애플을 만들었다. 출시 3년 동안 미국 PC 시장에서 15%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대박 행진을 이어가며 잡스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
성공이 빨랐던 만큼 추락도 빨랐다. 거대 기업인 IBM이 PC 사업에 뛰어들면서 애플의 영향력은 곤두박질 친 것. 게다가 타고난 독선적인 성격 탓에 회사 내부에서조차 많은 이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이에 잡스는 절치부심하며 83년부터 야심작을 준비했고, 매킨토시를 내놓았다. 제품 자체는 혁신적이었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85년 회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애플에서 물러나 수 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그는 꾸준히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화로 일을 냈다. 자신이 운영하던 컴퓨터 그래픽 업체인 픽사가 디즈니와 제휴해 내놓은 '토이 스토리'가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이후, 잡스는 '벅스라이프'와 '몬스터 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회생의 발판을 확실하게 마련했다.
영화로는 성공했지만, 애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잡스는 96년말 고문 자격으로 애플에 재합류했고, 아이맥을 내놓으면서 그 무렵 부상했던 MP3 시장에 주목했다. 이어 2001년 '아이튠스'와 '아이팟'을 선보이며 디지털 음악 시장을 석권했고, 2007년 맥월드에서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다시 한번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수 년 째 췌장암 등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엄청난 집념으로 '태블릿 PC'란 비장의 무기를 들고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다.
허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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