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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 <19> 경주 용강동 고분 토용(土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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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 <19> 경주 용강동 고분 토용(土俑)

입력
2010.01.26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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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일원에는 신라시대의 무덤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대부분 도굴을 당했다. 그러나 현재 경주시가지의 평지에 모여 있는 무덤들은 다행히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았다.

그것은 무덤의 구조가 돌무지 덧널무덤 즉 적석목곽분(績石木槨墳)이라고 하는데 나무곽(木槨)안에 나무널(木棺)을 넣고 나무곽 위에 냇돌(川石)을 쌓아올려 나무곽 전체를 두텁게 쌓은 후 그 위에 흙으로 봉토를 씌워 높이가 10미터가 넘는 규모를 이루고 있어 완전하게 파헤치지 않으면 도굴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지배층은 후대에 있을 도굴행위를 미리 알고 그렇게 무덤을 마련했는지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가까워지는 6세기경부터 돌방무덤 즉 석실분(石室墳)으로 무덤형태가 바뀌기 때문에 이 무덤은 도굴이 쉬운 편이라 일제강점기 때에 대부분 도굴의 화를 입었다. 그래서 돌방신라무덤에 부장된 유물의 진면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용강동고분의 발굴은 그러한 의문을 단번에 풀어주게 되었다.

경주에는 신라문화동인회라는 문화재를 사랑하는 민간인 모임이 있다. 그들은 마치 신라시대의 화랑도처럼 경주의 이곳저곳을 답사하면서 새로운 유적을 발견하면 당국에 알려주고 보존대책을 세우라고 건의하기도 한다.

70년대 어느 날 이들의 눈에 용강동고분이 들어왔다. 경주시 용강동 1130번지 마을 어귀에 있는 이 무덤은 예부터 고려장 또는 말 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었을 뿐 누구도 이 무덤이 신라인의 옛 무덤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동인회에서는 답사를 통해 틀림없는 신라 귀족 이상의 무덤이라고 판단하고 경주시청과 국립경주박물관 등에 발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결국 화살은 경주고적발굴조사단(1990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신설)으로 발굴조사 명령이 떨어졌다.

1986년 6월 필자를 중심으로 발굴 팀을 구성해서 조사에 임하게 되었다. 외형상으로 보아 틀림없이 도굴당한 무덤이었기 때문에 간단히 내부구조 조사 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조사에 임했으나 의외의 결과를 얻게 되었다.

즉 흙으로 빚어 만든 인물 토용(土俑)을 비롯 청동제 12지상(十二支像)의 일부 및 토제말(土馬), 토기 등등 통일신라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적지 않은 유물을 발굴하게 되었다.

이들 출토유물 가운데 우리의 눈을 가장 크게 뜨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무술 하는 자세의 인물토용 2점이다. 이 2점의 토용을 마주보게 하면 마치 오늘날 택견의 대련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 국기나 다름없는 택견의 뿌리는 대체로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려보고 있는데 그것은 고구려 무용총(舞踊塚), 삼실총(三室塚) 등에 남아있는 벽화에 근거한 추정이다.

그런데 이 용강동무덤에서 출토된 토용은 그림이 아닌 토제품으로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이 택견 모습의 토용 출토는 역시 택견이 삼국시대부터 우리민족 고유의 무술로 자리잡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발굴조사 후 주변이 정비되고 무덤은 사적 제 328호로 지정되어 잘 보호받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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