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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꽃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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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꽃차례

입력
2010.01.26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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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나면서 마음 들머리가 지워졌다

빛살로 환하던 여백들이

세찬 비바람에 켜질 당할 때

그 폭풍우 속에 웅크리고 앉아

절망하고 절망하고서 비로소 두리번거리는

늦봄의 끝자락

운동모를 눌러쓰고 몇 달 만에 앞산에 오르다가

넓은 떡갈잎 양산처럼 받들고 선

꿩의밥 작은 풀꽃을 보았다

힘겹게 꽃 창 열어젖히고 무거운 머리 쳐든

이삭꽃의 적막 가까이 원기 잃은 햇살 한 줌

한때는 왁자지껄 시루 속 콩나물 같았던

꽃차례의 다툼들 막 내려놓고

들릴락 말락 곁의 풀 더미에게 중얼거리는 불꽃의 말이

가슴속으로 허전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벌 받는 것처럼 벌 받는 것처럼

꽃 진 자리에 다시 써보는

뜨거운 재의 이름

시든 화판을 받들고 선

저 작은 풀꽃이 펼쳐내는 이별 앞에

병든 몸이 병과 함께 비로소 글썽거리는, 해거름!

● 이번 겨울은 얼마나 맵고 추운지 길을 나서면 완전히 벌거벗고 걸어가는 듯 썰렁하기만 합니다. 소빙하기 같은 단어가 신문에 실린 것을 보고도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럴 듯해서가 아니라 그게 소빙하기든 뭐든 어떤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죠. 이제 첫 꽃이 필 때까지 봄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진짜 눈덩이처럼 커져만 갈 겁니다. 하지만 봄은 얼마나 늦게 오는지, 대개 기다리다가 지치는 게 다반사죠. 그래서일까요? 봄이라면 언제나 회복기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느껴져요. 그건 아마 기다리는 마음도 너무 오래 되면 맥이 풀리고 시름시름 앓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떠난 것 말고 아직 오지 않은 것 때문에 시름시름 앓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지요. 때론 그렇게 기다리다가 앓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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