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30> 일산 신도시가 태어나기 까지(1)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30> 일산 신도시가 태어나기 까지(1)

입력
2010.01.25 23:10
0 0

일산에 신도시를 짓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당초 토지개발공사에서 그려온 일산 신도시의 위치와 형상은 현재의 백마역을 중심으로 달처럼 원형이었다. 그래서 경의선 철도가 신도시의 한 가운데를 지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있으면서 대전직할시 광주직할시 충북 제천시 등에서 시내를 관통하는 철도 때문에 매년 수많은 인명사고와 불편사례가 있으니 철도를 옮겨달라는 민원을 받은 일이 있었고 철도 이전비용으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있음을 경험한 바 있었다.

그래서 철도가 시내를 관통하지 않도록 신도시의 위치를 다시 잡아오도록 토지개발공사에 요청했다. 다시 그려온 도시의 경계가 현재 일산시의 모습이다. 철도를 관통하지 않도록 하다 보니 당초 둥근 달 모양이었던 도시경계가 기다란 네모꼴의 모습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일산에 신도시를 세우려고 보니 안팎에서 반대가 밀려왔다. 정부안에서의 반대는 주로 안보상의 불안 때문이었고 밖에서의 반대는 민생과 관련해서였다. 안에서는 우선 건설부에서 신도시 건설을 맡아 해내야 할 일부 국장과 과장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몇 해 전 목동 주택단지를 개발했을 때 100여 만 평 밖에 안 되는 물량인데도 장기간 미분양이 있었다는 점, 1967년 김신조 사건 등 안보상 불안 때문에 휴전선에 인접한 이 지역에 대한 기피증이 있다는 점, 이런 상황에서 5대 신도시를 한꺼번에 지어 놓으면 결국 일산에는 들어올 사람이 없어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문제제기가 순수한 나라걱정에서 나온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산 신도시 건설은 이곳에 신도시를 지어 안보상의 불안과 강북 기피증을 치유하겠다는 역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여러 번 설득했지만 그래도 계속 고집하는 사람은 부득이 본인에게 불이익이 되지 않는 다른 보직으로 바꾸고 사업을 추진했다.

또 다른 반대는 국방부 쪽이었다. 국방부에서는 일산 신도시 예정지가 북의 포 사정거리에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안보상의 이유 때문에 일산신도시 계획에 부정적이었다. 우리는 일산 신도시 건설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설득했으며 청와대도 여기에 협조했다.

정말 대응하기 어려운 것은 주민들의 반대운동이었다. 주민들은 연일 모임을 갖고 반대 시위를 했으며 경운기 등 농기계로 서울 진입도로를 점거하고 농성하기도 했다.

일산은 대부분이 농지였기 때문에 반대하는 주민들도 거의 농민들이어서 농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분은 공화당 지역구 국회의원이던 이택석 씨였다. 이 분은 여러 차례 나를 찾아왔으며 국회에서도 끈질기게 백지화를 요구했다.

이들의 반대는 보상가격문제뿐 아니라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떠나야 한다는 상실감도 작용하고 있어서 보상가격만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무렵 나는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모자를 눌러 쓰고 차를 몰아 일산 신도시 지역을 서너 차례 돌아보았다. 한번은 집사람과 같이 가기도 했다. 한마디로 삭막하고 살풍경했다.

'신도시 건설 결사반대''생존권 보장하라'등의 구호가 담벼락마다 붉은 페인트 글씨로 써 있고 그러한 구호의 플래카드가 어수선하게 마을 곳곳에 걸려 있었다. 농민들의 이 아픔을 딛고 이곳에 신도시 세울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89년 5월10일 일산 주민대표 열다섯 분이 장관 면담을 요청해 왔다. 장관이 만날 필요는 없다는 실무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분들을 장관실로 안내하여 만났다. 그 분들은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떠나야 하는 아픔, 농지 대토 마련의 어려움, 재산상의 피해 등을 들어 백지화를 요구했다.

나는 농민들에게 재산상의 피해도 없고 농지대토를 마련하는데도 충분하도록 보상을 하겠으니 대신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는 아픔을 대승적 차원에서 받아들여달라고 호소했다. 나의 설명을 듣고 일부 주민대표는 다소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백지화를 요구하고 꼭 일산에 신도시를 지으려면 심학산이라는 명당자리가 있으니 그 곳에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 심학산(尋鶴山)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 뒤 나는 이 산을 찾아 갔다. 자유로를 북쪽으로 가다가 일산을 지나 약 3킬로미터쯤 더 가면 출판단지가 나오는데 바로 그 옆에 홀로 우뚝 서있는 산이 심학산이다.

요즘 매년 열리는 파주시 꽃 축제도 여기서 열리고 있다. 영조 때 조정에서 기르는 학이 없어졌는데 이곳에서 찾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높이는 191fm밖에 안 되지만 넓은 평야지대에 홀로 우뚝 서있어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산정에 오르면 개성 송악산도 보이고 서울 문산 김포 교화 등 주변일대가 내려다 보여 가히 명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일산과 분당은 광화문 기점 25㎞를 기준으로 터를 잡았는데 심학산은 너무 멀고 또 이미 모든 건설사업이 진행 중이어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든 이 곳이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경기도가 심학산과 일산시 사이 약 600만 평의 넓은 땅에 신도시를 계획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그 때 일이 떠올랐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