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강릉에선 소를 '생구'라고 부릅니다. 생구는 '식구'와 어원이 닿아 있는 말입니다. 소를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식구처럼 대했던 거죠."
소설가 이순원(52ㆍ사진)씨가 장편소설 <워낭> (실천문학사 발행)을 냈다. 구한말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뜨거웠던 2008년까지 120여 년을 무대로, 강릉의 평범한 농가인 '차무집' 사람들과 그들이 키우던 소들의 이야기다. 워낭>
차무집 검은눈소의 영혼이 도심의 촛불집회 인파 속에서 차무집의 막내를 발견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막내는 검은눈소가 살아 있을 때 함께 들과 산을 누볐던 친구였다. 검은눈소는 "평생 풀만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우리 형제의 뼈와 머리를 바수어 섞은 사료"(14쪽)를 먹이는 야만적 현실로부터 시계를 되돌려, 사람 4대와 소 12대가 공생했던 차무집의 역사를 들려준다. 물론 외딴 산골마을의 차무집에도 6ㆍ25, 산업화 등 격동의 역사가 어김없이 찾아들어 사람과 소의 관계를 흔든다.
이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경사회에서 사람과 소가 맺었던 친밀한 관계를 세밀하게 복원한다. 차무집 사람들은 걸레 대신 행주로 소의 얼굴을 닦아주고, 어미 뱃속에서 죽어 나온 송아지를 고이 묻고, 늙은 암소가 행여 노산(老産)의 고통을 겪을세라 교미시키지 않는다. 그들에게 소는 사육 대상이 아니라 "농경을 협업하는 동업자들"(77쪽)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사람과 소의 긴밀한 관계는 종(種)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어느날 한쪽 뿔이 빠진 수소를 보며 "아내의 오른쪽 머리에 한 옴큼 머리카락이 빠진 자리"(198쪽)를 떠올린 집주인은 그 수소가 아내의 목숨을 이었다며 각별히 대한다. 불편한 몸 때문에 늘 사람들의 괄시를 받던 세일이가 소와 가깝게 지내다 결국 소몰이꾼으로 평생을 보내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25일 기자들과 만난 작가 이씨는 "영화 '워낭소리'를 보고 동생과 이야기하던 중 동생이 실제 친형제처럼 지냈던 검은눈소 얘기를 꺼냈다"며 "내가 보고 들었던 소 이야기를 소설로 꼭 써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동생과 그 추억을 떠올린 것이 집필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고기 색깔을 선명하게 하려고 소에게 빈혈을 유발하는 약을 먹이고 육질을 높인다고 소를 거세하는 비인간적 현실을 되돌아보자는 뜻도 소설에 담았다"고 말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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