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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밤과 나의 리토르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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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밤과 나의 리토르넬로

입력
2010.01.25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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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은 8월이었어요 날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등 뒤로 여름이 가고 있지만 가을은 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한 장의 얼굴을 갖지 못한 흉상

여름과 가을 사이에 놓인 의자랍니다

나는 체스의 규칙을 모르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밤과 낮의 형식을 좋아해요

눈을 감았다 뜨면

감쪽같이 비가 오거나 목소리가 변하거나

나무들이 푸르러졌어요

누군가 피를 토하면서도 다리를 꼬고 있다면

그건 죽음에 대한 예의일 것이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면

그건 나에 대한 의심일 테지만

나는 너무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고 말할 거예요

사소한 바람에도 땅을 움켜잡는 나무가

의자에 붉은 잎사귀 몇, 뱉어 놓는 밤에

나의 입안에선 썩은 모과 향이 꽃처럼 확, 피었다 지고 있어요

● 이 시를 옮겨 적다가 실수로 '나무'를 '나부'라고 쳤습니다. 裸婦. 백스페이스 키로 그 글자를 지우지 않고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어요. '눈을 감았다 뜨면 감쪽같이 비가 오거나 목소리가 변하거나 나부들이 푸르러졌어요.' 잘못 쓴 문장을 두고 이렇게 오랫동안 생각한다니 명백한 실수에서 비롯한 일이 공들여 그 단어를 고른 시인에 대한 불경으로 이어지는군요. 미안해요. 실수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하는 일은 제 오래된 버릇이에요. 뭐, 반성하고 후회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놀라기 위해서. 동네를 산책하다가 잘못 들어선 길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작은 공원을 발견했던 어느 여름처럼. 그 공원에 앉아 어쩌면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게 아닐까고 생각할 때처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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