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저명 금속장신구 작가가 지난 해 말 주한 외국인 대사 부인들을 초청해 가진 작품 설명회 때의 일이다. 화기애애하던 일행은 은장도 앞에서 싸늘해졌다. 표정들이 하얗게 질리더라는 것이다. '정치와 전쟁은 남자들이 벌였는데 왜 여자가 죽나, 부당하다''불쌍하고 참혹하다'…. 통역사가 '장신구일 뿐'이라고 무마했으나 분위기는 요지부동. 그 때 정영선(42)씨가 나섰다.
"은장도는 모든 유혹을 끊고 한 사람만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증표입니다. 살생의 의미가 아니라 다짐과 맹세의 상징입니다."그제야 참석자들의 표정이 풀렸고, 여성 잔혹사를 성토하던 대사 부인들은 너도나도 은장도를 사갔다고 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이야기를 가공해 마케팅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스토리마케팅'이라고 한다. 2005년부터 국내에도 번역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들면서 관심은 커졌지만, 이를 전문화한 업체는 유제영(55) 정영선씨 부부의 '브랜드스토리'가 유일하다. "이야기의 효과와 필요성은 다들 인정하면서도 기법의 전문성은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이 컨셉트의 사업화 구상은 창덕궁 산책을 하면서 비롯됐다고 한다. "어느 전각이 언제 불탔고, 어느 임금 때 복원됐고, 팔작지붕이 어떻고…, 가이드는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외국인 관광객들은 시큰둥해 하더라고요. 저건 아니다 싶더군요. 사도세자가 죽은 곳이잖아요. 만일 꼬마 세손이 편지 한 통을 관광객에게 불쑥 내밀면 어떨까요. '도와주세요,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고 해요.' 세손을 따라 가면 사도세자가 죽은 휘령전이 나오죠. 아주 강렬한 메시지를 통해 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유씨 부부가 문화재 가이드를 사건과 사람 중심의 드라마로 각색해 소개하자는 기획서를 들고 여기저기 들이밀었으나 첫 반응은 차가웠다고 한다.
학고재 대표 손철주씨가 이 사연을 알고 친구인 김종민 전 문화관광부 장관(당시 한국관광공사 사장)에게 소개했고, 그 인연으로 대관령 생태관광지 스토리텔링 사업권을 따낸다. '생명의 땅 평창' 슬로건은 그렇게 탄생한다. 이후로 이들의 사업은 아연 활기를 띤다. 경복궁 관광가이드 사업, 서울 구역사 단장 사업도 그들이 해내고 있다.
유인촌 장관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성과 가운데 하나인 '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문전성시사업)'의 주춧돌도 그들의 '스토리텔링'이었다.
"수원 못골시장에 가면 '은하잡곡'이라는 노점상이 있어요. 주인 성은숙씨는 20년 넘게 잡곡을 팔면서 자궁암과 갑상선암을 이겨냈고, 아들을 슈퍼헤비급 권투선수로 키워낸 분이죠. 그래서 저희들이 '권투 글러브를 매고 장사를 하시라'고 권했어요. 사연을 듣게 된 손님들은 대개 단골이 되죠."
성씨는 시장 유명인사가 되면서 매출도 20% 넘게 늘었고, 이야기의 힘을 절감한 다른 상인 너도나도 사연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의 사연이 지난 해 단행본 <못골시장 라디오스타> 로 묶여 출간되기도 했다. 못골시장>
"작가 아이작 디네센이 그런 말을 했다죠.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는 것이다'라고.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이야기는 인생 그 자체죠. 저희 스토리텔링 컨셉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껏 정부나 공공기관 관련 일만 해오던 '브랜드스토리'는 올해부터 민간 분야로 영역을 확장할 참이다. "우리처럼 영세한 문화컨텐츠 업체는 좀처럼 신뢰하지 않거든요. 이제 커리어도 웬만큼 쌓였으니 홈페이지도 열고 마케팅을 시작해볼 참입니다."
소설 쓰면서 방송작가로도 오래 일한 유씨 부부에게 이야기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 일상을 이들은 사업 밑천으로 삼았다. 그 노다지 광산에서 그들이 캐내 가공해줄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더 다양한 삶의 가치들을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상품의 가치로 전이된다면 그게 바로 건강한 문화자본주의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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