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경남 고성읍에 위치한 한 개인병원에서 내로라 하는 청년 바둑고수들이 숙식을 함께 하며 바둑공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열성적인 바둑 애호가였던 내과의사 권재룡 박사가 자신의 병원 4층 옥탑방을 개방, 전국의 청년고수들이 자유롭게 찾아와 기거하면서 바둑공부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어쩌면 한국 최초의 민간 바둑도장 혹은 바둑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겠다.
"권 박사는 그보다 강호의 준걸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뜻에서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이라고 부르는 걸 더 좋아하셨지요." 당시 권박사 도장에 머물렀던 한 아마추어 바둑인의 회고다.
30여년 전 바둑계가 지금처럼 활발히 움직이지도 않고 바둑인으로서의 앞날에 대해 별 비전이 없던 시절, 팔각정 형태로 만들어진 그 옥탑방은 젊은 바둑천재들이 그리던 꿈속의 낙원이자 '해방구'였다.
임선근 이주룡 강만우 박상돈 김기헌 장명한 차수권 김동면 정대상 조대현 문용직 양재호 허장회 임창식 김일환 황원준 이기섭 박수현 박성균 신영철 유경남 임동균 이학용 조병탁 강정길 이수명 등 숱한 청년 고수들이 옥탑방을 찾았다.
70년대 중반 고성 옥탑방에 모였던 청년들은 모두가 바둑천재였지만 당시엔 바둑 만으로 미래를 설계하기엔 너무 여건이 좋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대학을 가거나 취업하는 청년에 비하면 미래가 너무 불투명했다.
그래서 옥탑방은 일종의 도피처이자 치유의 장소이기도 했다. 어느덧 50대 중반에 접어든 한 아마추어 고수는 "어쩌면 그때가 내 인생의 절정기였는지도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고성 양산박은 이름이 풍기는 뉘앙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아무런 규칙이 없는 곳이었다. 누구나 언제든지 마음 내키면 찾아 왔다가 아무 때나 툭툭 털고 떠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강호에 소문난 청년고수들이 잇달아 이곳을 찾았고 아는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개중에는 하루 이틀 있다가 바람처럼 사라지기도 했고 몇 달씩 머물기도 했다. 몇 명이 얼마 동안 머물든 숙식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병원 찬모가 항상 웃는 낯으로 모두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했다.
당시에는 체계적인 바둑이론이나 바둑에 관한 최신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던 시절이라 전국의 고수들이 모인 이곳이 자연히 최신 이론의 습득장이 됐고 공동연구와 실전훈련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옥탑방 내부 팔면 벽에는 천정까지 온통 바둑책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권 박사는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일본 바둑책들을 열심히 구입해 비치했고 일본 바둑잡지는 물론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산케이 등 일본 신문들도 오직 매일 연재되는 기보를 보기 위해 구독했다고 한다.
옥탑방 청년고수들은 이같이 풍부한 공부 재료와 쟁쟁한 라이벌 틈에서 절로 바둑이 늘어서 78년 강만우 이주룡을 시작으로 79년 양재호 80년 임선근 조대현 81년 박상돈 82년 정대상 83년 문용직 85년 차수권 등 매년 한 두 명씩 차례로 입단, 프로 무대로 올라 섰다.
그리고 얼마 후 권 박사가 작고하면서 옥탑방 바둑도장도 문을 닫았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어느덧 권 박사와 팔각정 옥탑방에 얽힌 이야기는 일부 바둑인들의 기억 속에 묻힌 아름다운 전설이 되고 말았다.
이같은 내용의 '고성 권박사 도장' 이야기가 최근 바둑소설로 다시 태어났다. 올초부터 인터넷바둑사이트 타이젬에서 '낭만기객'이라는 제목의 바둑소설을 연재 중인 작가 김종서는 "벌써 30여년 전에 고성의 작은 병원 옥탑방에 연구실을 차리고 바둑청년들을 후원했던 권재룡 박사 이야기는 그동안 바둑인들 사이에 드문드문 전해지긴 했으나 그분의 진면목이 충분히 소개되지 못했다.
수 차례 현장 답사를 통해 그분의 행적을 되짚어 볼수록 정말 대단한 천재이자 기인이며 한국 바둑사에 엄청난 자양분을 공급한 위대한 후원자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며 "권 박사 이야기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다뤄도 소설 못지 않은 가치가 있지만 대다수 등장 인물들이 생존해 있는 관계로 실명 대신 가명을 쓰고 몇 가지 픽션을 가미해서 4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바둑을 무척 사랑하고 아꼈던 재야 바둑인들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훈현 9단의 조카이기도 한 작가 김종서는 2003년 타이젬에 한국 최초의 본격 바둑소설 '승부사'를 연재한 데 이어 '전신 조훈현' '바둑 삼국지'를 집필했고 '타이젬 스페셜' '유저수첩' 등을 통해 다양한 바둑콘텐츠를 발굴 소개해 왔으며 현재 바둑신문에 대하바둑소설 '밥'을 연재 중이다. 소설 삽화는 미술을 전공한 딸 김상아양이 맡았다.
박영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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