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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21> DJ의 재야집착 - 민주화 무산의 한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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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21> DJ의 재야집착 - 민주화 무산의 한 요인

입력
2010.01.25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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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 공동의장은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이 맡았고, 집행위원장은 문익환, 집행위원은 이문영 예춘호 고은 등과 국민연합 홍보국장을 맡고 있던 심재권, 조직국장을 맡고 있던 나였다.

그런데 규약을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나 공동의장 가운데 한 분이라도 반대하면 부결된 것으로 간주돼 활동이 난관에 봉착한 때가 많았다.

1980년 1월 하순경 국민연합 집행위원회에서 김재규 구명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나는 조영래에게 부탁하여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서 집행위원회에 내놓았는데, 집행위원들은 물론 윤보선, 함석헌 두 분 공동의장도 좋은 내용이라고 동의했다.

그런데 김대중 공동의장은 김재규 구명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신군부와의 정면충돌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집행위원회에서 결의된 사항이고 중요한 문제여서 문익환 목사가 여러 차례 김대중 씨를 찾아가 설득해서 신군부를 직접 비난하는 문구는 빼는 조건으로 동의를 얻어내 청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나는 김대중 씨 댁을 자주 방문했다. 일체 출입을 금하던 안채에서 저녁식사 대접을 받은 일도 있었다. 김대중 씨가 나에게 이런 대접을 한 이유를 그 당시에는 내가 징역을 살고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식사라도 대접하려는 줄로만 생각했으나 시간이 좀 지나 생각해 보니 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인 것 같았다. 김대중 씨가 나를 특별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내가 유능해서라기보다 영남출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를 할 생각은 없었다. 김대중 씨가 싫어서가 아니라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닌 만큼 나는 세상을 바꾸는 일을 계속하고자 했고, 그 길이 정치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정치에는 여러 차원의 정치가 있는데, 여기서는 한국의 보수정당들이 벌여온 정치를 말함.)

나는 이렇게 김대중 씨를 자주 만나 대접도 받고 담소도 나누다 보니 정이 많이 들었다. '이 양반이 나를 무척 좋아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이 양반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열심히 해줘야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김대중 씨와 나와의 이런 인간관계는 내가 민중당을 하던 1992년까지 지속되었고, 김대중 씨와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빠진 것은 1998년 인터넷사이트에 '노벨상 욕심 때문에 나라가 망하겠구나'라는 글을 올린 뒤부터였다. 내가 미리 이것을 밝혀 놓는 것은 선입견에 따른 오해가 없기를 바라서다.)

하여튼 정세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전두환은 관련 법률을 위반하면서까지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했다. 성명서 등으로 비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신군부의 집권음모를 저지할 수 있는 뚜렷한 방안이 없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투쟁에 떨쳐나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투쟁파와 비투쟁파의 탁상공론도 문제였지만 총학생회장선거가 있다든가 워밍업이 필요하다든가 하는 문제로도 투쟁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초 김대중 씨의 '덕산발언'이 나왔다. 김대중 씨는 '신민당에 입당하지 않고 재야민주세력에 기반해서 새로운 정치세력(정당)을 형성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굉장한 파문을 불러일으킨 발언인데, 국민연합 관계자들과 김대중 씨 측근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김대중 씨 집 응접실에서 회의를 열었다.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한완상 김종완 심재권 나 등 40여 명이 참석했고, 이희호 여사도 참석했다. 이날의 논점은 당연히 김대중 씨의 신민당 입당 여부, 신민당에 입당하지 않을 경우 독자정당 건설 여부, 독자정당을 건설할 경우 국민연합에 기반한 정당을 건설할 것인지 아니면 국민연합과는 별개로 신당을 창당할 것인지 하는 것이었다. 논의가 분분하기에 내가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신민당에 입당하는 것도 좋고 신당을 창당하는 것도 좋은데, 신군부의 집권연장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국민연합을 중심으로 강력한 민주화투쟁을 전개해야 하기 때문에 국민연합에 기반해서 신당을 창당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앞으로 신군부의 집권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국민연합은 강력한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데 이 경우 김대중 씨가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으면 국민연합의 투쟁도 지장을 받고 김대중 씨 또한 탄압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직을 사임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다들 공감했다. 이희호 여사도 내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김대중 씨가 내 의견은 옳지 않다고 했고, 아무도 김대중 씨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함으로써 내 주장은 무위로 끝났다.

김대중 씨는 어떤 경우에도 재야의 기반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자기가 재야에서 비켜서야 재야의 활발한 투쟁을 통해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고 민주화가 돼야 대통령도 될 수 있는데, 자기가 재야를 붙들고 있음으로써 민주화도 놓치고 대통령도 놓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재야에 없는 게 더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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