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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19> 남효온의 '육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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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19> 남효온의 '육신전'

입력
2010.01.25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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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 남효온(秋江南孝温,1454-1492)은 죽음을 무릅쓰고 <육신전(六臣傳)> 을 지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평생 사우(師友)로 세속과 짝하지 않은 방외인이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지지 않자, 20대에 세상 뜻을 버리고 산천을 두루 찾아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했다.

의식(衣食)이 거칠고 술을 그치지 않아 39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가을 강의 뜻을 담은 '추강'이란 그의 아호는 김시습의 '설잠(雪岑)'처럼 단종과 소릉의 한을 담은 방외인의 차가운 삶의 고뇌를 드러낸다.

스스로 '자만 4장(自輓四章'>이란 긴 만사(輓詞)를 쓴 추강은 '여섯 가지 액'을 읊어 자기의 삶을 반어법으로 희화화했다. 특히 술 때문에 병에 걸린 그가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주덕송(酒德頌)>'라 할 사연이 지극경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지주부(止酒賦)'를 짓고, 10년 동안 정말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했고, 중풍을 앓아 다시 술을 마시다가 병이 그치자 '부지주부(復止酒賦)'를 짓고 다시 5년 동안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추강은 스스로 "36년을 지나는 동안에 언제나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는 실로 죽어서도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허균(許筠)은 '남효온론'을 쓰면서, 추강이 겨우 스무 살부터 항소해서 서둘러 스스로를 곤궁한 몸으로 내쳤다고 애석해 하면서도, 벼슬에 연연한 그의 스승 김종직을 혹평하여 추강의 기개와 강개한 인품을 높이 기렸다.

추강이 남긴 <육신전(六臣傳)> 과 <허후전(許詡傳)> 이 모두 충신전이다. 특히 <육신전> 은 각각이 독립된 전을 이루는 통일된 주제의 집전(集傳)으로 지은이의 인물관과 역사의식을 대변한다(박희병; <한국고전인물전연구> 참조).

'박팽년전'은 <육신전> 의 머리를 이루면서 '성삼문전'으로 이어지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농담을 즐기고 앉고 눕는 것이 절도가 없는 성삼문에 비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풀지 않는 박팽년의 지사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삼문은 달군 쇠창에 다리가 뚫리고 팔이 잘리는 형벌 속에도 '안색불변'하는 의연한 지조로 높이 평가 되었다.

<육신전> 의 후반은 남은 네 명의 전으로 간략하나, 몸이 쇠약한 이개가 곤장 밑에서도 '안색불변'의 지사로 장하게 그려지고, 유성원은 사건이 나자 부인과 술을 나누어 영결하고 사당에 올라 자결한 사실로 현창했다.

하위지는 세종 이후 인재를 논할 때 첫째로 꼽혔다는 세간의 평가로, 유응부는 무인으로 선비와는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한 기개를 높이 샀다. 특히 그는 달군 쇠를 가져다 배 아래에 놓아 기름과 불이 함께 일어났는데도 '안색 불변'으로 끝내 불복하고 죽었다 하여, 이 <육신전> 의 대미로 삼았다. 이야말로 '선비전'의 교과서일 터이다.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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