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삼 년 동안 두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나는 종종 임무수행 중이었다./ 내 아이들이 아팠을 때,/ 약을 구한 것은 친구들이었다.// 기분이 나면 우리는 서로를 끌어 모으고/ 마루에 앉아 시를 읽곤 했다./ 쌀이나 설탕을 사러 늘어선 행렬에서/ 친구들은 나를 앞자리에 세워주었다.
김정환 시인이 번역한 베트남 시인 휴틴의 시 '친구들이 사는 읍'의 한 구절이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휴틴은 베트남의 전쟁영웅이기도 하다. 196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갑부대 탱크 운전병으로 참전했던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사이공을 점령한 월맹군의 하나로 기억된다. 그의 시가 베트남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휴틴이라는 그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고 한다. 원래의 휴틴은 그의 전우이자 시를 쓰는 열일곱 살 소년병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휴틴이 된 것은 이 친구를 전장의 참화 속에서 잃어버린 뒤라고 한다.
그러니까 휴틴이라는 이름 속에는 적어도 두 몫의 인생이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휴틴은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은유다. 휴틴을 통해 우리는 죽은 자를 망각하지 않으려는 산 자의 처절한 의지를 본다.
그의 동료, 친구들에 의해 고 김현식의 20주기 추모 헌정 앨범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맨 처음 떠올린 것도 바로 이 휴틴의 일화다. 김현식의 추모 앨범은 우리가 그의 이름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것은 내 사랑 내 곁에 두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고 기형도 시인의 경우라고 다를까. 1990년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난 김현식이 올해 20주기가 되었다면, 그 전 해인 1989년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사고사한 기형도는 작년에 이미 20주기를 맞이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마련한 추모집 <정거장에서의 충고> 를 통해 그의 삶과 문학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정거장에서의>
아마도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없었더라면,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이 없었더라면 지나간 1980년대를 기억하는 작업이 조금은 무미건조해졌을 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감히 전쟁의 기억에 비견할 수는 없으되, 그렇다고 한들 그 시간이 휴틴의 시간만큼 힘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어떤 식으로든 자기 경험의 한계 속에서 살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쨌든 기억의 전장 속에서 그들을 잃었고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살아남아 그들을 추억한다.
그렇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중요하다. 살아남았기에 휴틴은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전우들을 시 속에 소환해 되살려 낼 수 있었다. 김현식의 음악과 기형도의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에 의해 그들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산다. 살아남았다는 것이 때로 추문이 되고 환멸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자가 없다면 우리의 아름다움도 전설도 모두 말짱 꽝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확인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죽은 자를 추모할 의무가 있다. 기형도를 추억하는 시인 이문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진정한 삶을 살고자 애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에는 죽은 사람의 삶이 반드시 들어가 있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죽은 삶과 더불어 사는 삶에 다름 아니다. 진정 추모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신수정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