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진혁(가명)이는 주의가 산만한 과잉행동장애(ADHD)를 앓고 있다. 중국동포인 부모가 이혼한 뒤 지역주민센터 취로사업으로 연명하는 70대의 가까운 친척할머니가 홀로 키우고 있다. 녀석은 수업엔 도통 관심이 없다. 그저 눈길 닿는 대로, 손길 머무는 대로 왔다 갔다 할 뿐이다. 보호자마저도 도움이 필요한 처지라 병원치료는 엄두도 못 냈다. 그런데 5개월 만에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단다. 선생님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늘어질 만큼.
#8세 해인(가명)이는 말이 없었다. 파산한 아버지가 해외로 일을 찾아 떠난 후 엄마랑 단둘이 살고 있다. 엄마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돌아온다. 한참 응석을 부릴 나이인데 살갑게 말을 나눌 상대가 없으니 수줍은 성격이 학교생활로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수업시간마다 손을 번쩍번쩍 든다. 발표를 하겠다는 것이다.
두 아이뿐 아니다.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이 불과 몇 개월 만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결손가정, 저소득 가정 등 아이들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딱지를 긁어낸 건 음악이다. 그저 직접 노래하고, 연주하고, 춤추는 사이 아이들이 달라졌다고 한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처지의 아이들이 호사를 누린 것도 모자라 꿈을 꾸게 됐다니, 그 현장이 궁금했다.
첫 화음은 엉망이었지만…
"우리 아이들 정~말 잘하죠?" 기습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공연을 코앞에 뒀다는데 선율은 뒤죽박죽이었다. 19일 찾은 서울 노원구 하계동 노원노인복지관 3층엔 초등학생 30여명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지휘를 따라가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데, 아이들은 밝고 인솔교사는 흐뭇해 보였다. 상계종합사회복지관의 정경숙 아동방과후교실센터장은 두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간의 변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 아이들은 처음 악기를 손에 쥐었다. 제 돈으로 산 게 아니라 장기임대 후원방식이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원이 200여명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음악교육과 더불어 공연에 설 기회를 주는 사회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해피아트 커뮤니티)을 한 덕이다.
처음엔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영구임대아파트 자녀들이 어렵다는 판단에 해당 아파트관리사무실(노원구와 강남구 일대)에 모집공고를 냈는데, 서류를 낸 아이는 한 달간 50명에 불과했다. 아파트관리사무실에서 음악교육 접수를 받는다니 일상에 찌든 부모들은 아예 몰랐거나 설마 했을 터. 결국 노원과 수서지역 8개 복지기관이 나선 뒤에야 겨우 정원(170명)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합창, 클래식, 뮤지컬 그룹 등 하나의 뮤지컬 공연을 위한 팀이 꾸려졌다. 연습은 각 지역별로 이뤄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악기를 다뤄본 적도, 노래나 춤을 춰본 적도 없을뿐더러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신음하고 있었다. 모 아동센터만 해도 공연 참가 어린이 20명 중 12명이 ADHD를 앓고 있었다.
클래식 첫 수업 시간은 목불인견이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악보를 던지거나 욕설을 하기도 했다. 주의력이 결핍된 아이들은 연습장을 빙글빙글 도는데 더 정신이 팔렸다.
그런 아이들을 시나브로 달라지게 한 건 수많은 칭찬과 작은 성과다. '바흐의 미뉴에트'와 'Any dream will do' 등 두 곡의 연습을 마친 뒤 아이들은 제 실력에 놀랐다.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예술교육지원센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진짜 공연에 앞서 작은 무대도 마련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은평구 '은평의 마을'에서 중증지체장애인 200명 앞에서 공연을 한 것이다. 난생처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기쁨은 열심히 외우고 손으로 익힌 악보마냥 머리 속에 오롯이 남았다.
합창을 가르친 바리톤 이상빈(35)씨는 "뭔가를 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마음 속 불씨에 음악이 바람을 불어줬다"고 말했다.
공연 뒤의 걱정
"우리 엄마는 어디로 들어와요?" 동연(가명ㆍ8)이의 관심은 엄마였다. 21일 서울 도봉구 '서울열린극장 창동'엔 공연을 앞둔 첫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녀석을 홀로 돌보는 엄마는 아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이날 야근을 한다고 했다. 엄마가 앉을 자리를 바라보던 동연이의 볼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입 꼬리는 길게 올라갔다.
총 879석 규모의 공연장 무대에는 아이들이 가득 들어찼다. 공연 소재는 '뮤지컬 공연을 준비하는 리허설 현장'이다. 연습량이 미천한지라 전문교육을 받은 중고등학생 형 누나들과 함께 선다.
리허설이 시작되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영롱한 빛을 냈다. 화음은 뒤틀리고, 선율은 다소 무너져도 아이들의 마음 속 불씨만은 보란 듯 꿈틀댔다.
그런데 정작 기뻐야 할 정경숙 센터장이 남모를 한숨을 쉰다. "공연을 마치고도 계속 악기나 합창교육이 이어질지 불투명해요. 장기임대라 공연 후엔 악기도 회수해야 하고…."행사를 주관한 예술교육지원센터 윤종현 센터장은 "계속 해서 아이들의 수업을 이어가기 위해 후원처를 수소문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의 공연은 23일 오후 5시 '서울열린극장 창동'에서 막을 올린다. 제목은 '꿈꾸는 아이들'이다.
고찬유기자
김혜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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