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탓만은 아니다. 한참 전에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인데, 유선방송으로 몇 번씩 다시 보아도 처음 보는 듯한 장면이 의외로 많다. 줄거리 전개상 꽤 중요한 장면인데도 전혀 기억이 없다. 흔히 컴퓨터에 비교되는 뇌의 기능으로 따져보아 영화를 처음 볼 때 오감을 통해 틀림없이 입력돼 저장됐을 터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중앙처리장치(CPU)가 저장된 정보를 읽어 들이지 못하는 꼴이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용량이 작은 저장장치에 새로운 정보를 보관하려다 보니 오래 된 정보를 지워서 공간을 확보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뇌의 저장능력이 최신 대용량 저장장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 앞에 힘을 잃는다. 더구나 훨씬 더 오래되고, 쓸모도 없는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만 보아도 뇌의 작은 용량이나 정보 갱신을 위한 낡은 정보 지우기 탓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이 실험과 통계로 확인한 지혜에 따르면 애초의 생각과 달리 처음부터 아예 입력되지 않았거나 입력됐더라도 저장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뇌는 감각기관의 인지작용에 자동적으로 관여하면서도, 인지된 정보 가운데 일부만 입력하고, 입력된 정보 가운데 일부만 저장한다.
■전자를 '선택적 주의(selective attention)'나 '선택적 노출(selective exposure)', 후자를 '선택적 보유(selective retention)'라고 한다. 같은 영화를 자꾸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두 가지 현상은 야속하지만, 뇌가 과부하를 막아 안전을 확보하려는 자율방어기제라는 점에서는 고맙다. 그런데 개인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가면 선택적 주의나 선택적 보유는 불필요한 논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기 쉽다. 같은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거나 기억에 남기는 내용이 사람마다 달라서 사실 자체에 대한 인식부터 커다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입력된 정보 가운데 자신의 관심과 흥미, 가치관과 신념에 부합하는 것만 가려내 저장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선택적 보유'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 여야 갈등 구도 속에서 동일한 '과거'의 전혀 다른 측면을 부각하려는 모습은 일상적이다. 세종시를 둘러싼 여당 내 '친이'ㆍ '친박' 갈등에서는 양측의 기존 당론 성립 과정에 대한 기억조차 다르다. 아직 입맛에 맞지 않는 정보를 버리는 대신 아예 입맛에 맞게 비트는 '선택적 왜곡(selective distortion)'에 이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까.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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