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이나 닉슨 행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같이 고전적인 사례로부터 이라크 대량살상 무기 보고서를 둘러싼 영국의 '길리건 사태'에 이르기까지, 입법ㆍ사법ㆍ행정ㆍ언론의 네 개 부문이 서로 싸우는 일은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에서 그리 유별난 현상이 아니다.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서울중앙지법의 무죄 판결 역시 이와 유사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이 판결에 대해 '언론자유의 승리'를 축하하는 입장에서부터 '사법부 개혁'을 주장하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언론의 정치성을, 법원이 검찰의 정치성을, 정당이 법원의 정치성을 의심하고 있지만 타자의 정치성을 비난하며 자신의 초(超)정치성을 주장하는 것만큼 정치적인 일은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작금의 지극히 정치적인 상황에서 쏙 빠진 것은 막상 정치를 담화할 권리를 사회적으로 정당하게 부여받은 언론의 정치적 실천 윤리에 관한 고민과 성찰이다.
언론의 정치성을 비난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어떠한 언어도 투명할 수 없으며, 사회현상이 언어로 매개되는 순간 그것이 절대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언론의 의도성을 고발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주저앉는 소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나왔든 정치적 색안경을 쓴 '불순한' 관심에서 출발했든지 간에) 언론의 기능이 특정한 현상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여론을 창출하는 가치지향적 목적을 지닌다는 점 역시 기능론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제가 이러하다면, 그것이 정부 정책에 대한 찬성이든 비판이든 언론의 의도성 자체가 처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법원의 판결 또한 진위에 대한 명쾌한 결정보다는 고민할 여지를 더욱 크게 남겨주고 있다. 예컨대 법적으로 승인될 수 있는 '과장'과 그렇지 않은 '허위'는 어떻게 구분하는가, 정치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부분적 잘못'과 '전체적 부합'을 그럴 수 없는 '전적인 오류'와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와 같은 까다로운 질문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심지어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의 질문은 역시 언론에게로 되돌아온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존재하는 언론 역할의 정당성과 권위란 지극히 기본적인 항목을 착실하게 수행하는 과정과 절차에서 확보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과정과 절차란 표현에 있어 언어적ㆍ기술적 실수를 범하지 않고, 복수 취재원들의 목소리를 싣고, 논설의 근거를 정확하게 밝히며, 자기오류의 가능성을 인지하는 태도에서 취재내용을 끊임없이 검토하고 검증하는 일상적이고 세세한 일들로 이루어진다. 이 항목들을 단지 'PD 수첩'뿐 아니라 우리 언론 일반이 얼마나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진지한 반성과 개선 노력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언론은 문자 그대로 말로써 설명하고 경쟁하고 평가하는 과정이다. 말의 작용이란 수사나 판결처럼 제도적 절차에 따라 일사천리로 추진되고 결정되는 대상일 수 없다. 문제성의 발견에서부터 실행의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숙고와 대화적인 관용과 인내의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언론의 덕목과 품질이 자율적으로 생성되고 평가되는 과정이 부재한 채 고소, 수사, 판결과 같이 외부적 권력과 원칙에 타율적으로 의존하고 판정받는 방식이 우선하는 상황 속에서는 그 어느 제도도 스스로 성찰하고 발전할 태도와 역량을 갖추기 어렵다. 많은 경우 자유는 가능성의_충분조건까지는 아닐지라도_필요조건이다. 우리 언론이라고 이러한 순리로부터 예외일 수는 없다.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