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면 일본 정부가 60년 만에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공탁금 명부를 우리에게 줄 예정인데, 정작 우리 위원회는 3월말이면 폐지되니 갑갑할 노릇입니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강제동원규명위)의 한 조사관이 털어놓은 답답한 심경이다. 일본 정부가 최근 우리 정부에 건네주기로 한 공탁금 명부는 일제시대 일본 기업들이 한국 노동자에게 주지 않았던 임금, 수당 등을 일본 정부에 공탁한 내역이 담긴 문서. 이 문서를 확보하면 당시 징용 피해자들이 임금 등을 돌려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이 업무를 담당하는 위원회는 3월 24일이면 법적 활동기간이 종료돼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위원회 일은 더 많아졌는데, 정작 위원회가 존폐 기로에 있으니 일이 손에 안 잡히네요.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하는지…."조사관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올해 활동기간이 속속 끝나는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의 뒤숭숭한 풍경이다. 각 위원회 별로 처리하지 못한 일이 적지 않지만, 활동기간 연장이 하나 같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정 시한으로 활동이 종료될 경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많은 과제들이 묻히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연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군(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기간이 끝나 폐지된 후 현재 남아있는 과거사 관련 위원회는 모두 15개.
이 중 강제동원규명위(3월2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ㆍ4월24일), 10ㆍ27법난피해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6월30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친일재산조사위ㆍ7월12일)는 활동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사위원회 등 나머지는 시한이 따로 명시돼 있지 않다.
강제동원규명위는 문 닫을 시기가 코 앞에 다가왔지만, 남은 일은 산더미다. 강제동원 피해 접수 22만7,986건 중 처리된 건수는 11만 9,093건(50%)에 불과하다. 특히 3월 공탁금 명부가 일본에서 넘어오면 피해자 확인과 보상 업무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위원회 관계자는 "다른 위원회에 통합될 것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게 아무 것도 없다"며 "위원회들은 근거법령에 따라 설치됐기 때문에 연장하거나 통합하려면 관련 법을 개정하는 등 절차가 복잡한데, 정부가 아직도 입장을 밝히지 않아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
규모가 가장 큰 진실화해위도 상황이 비슷하다. 활동기간이 앞으로 3개월밖에 남지 않았지만, 처리대상 1만1,044건 중 조사를 마치지 못한 사건이 2,539건(23%)이나 된다.
이영조 신임 위원장이 최근 "4월까지 남은 사건을 모두 처리하겠다"고 밝혔지만, 졸속 조사가 아닌 이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직원들 얘기다. 위원회가 자체 의결로 활동기간을 2년 더 연장할 수 있는데, 최근 상임위원들이 보수적 인사로 속속 교체돼 가능성은 낮다.
위원회 관계자는 "현재 분위기로는 직원 모두 연장이 안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친일행위자들의 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업무를 해온 친일재산조사위도 예정대로 7월에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조사위 관계자는 "위로부터 '일단 연장은 없다고 생각하고 정리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 일부 의원들이 위원회 연장 법안을 발의했거나 발의할 계획이지만,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강제동원규명위를 다른 위원회에 통합해 관련 업무를 지속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한 이명수 자유선진당 의원은 "강제동원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은 지속돼야 한다"며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여야 의원들에 호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태무 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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