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리처드(27ㆍ사진)는 이번 지진으로 가족을 송두리째 잃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누나 등 3명이 무너지는 집에 깔린 탓에 아직껏 시신도 빼내지 못했다. 부인이 카리브해의 친정으로 간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진이 가장 참혹하게 할퀴고 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 까르푸에서 그는 먼저 접근해왔다. 포르토프랭스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까르푸는 이번 지진의 직격탄을 맞아 가장 피해가 참혹했다. 그는 흔치 않은 유창한 영어로 "영어 할 줄 아느냐, 내 말좀 들어달라"고 했다. 아마 기자를 외국인 구조대 일원으로 생각한 듯 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집도. 당장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라디오를 듣는 게 유일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_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가.
"그냥 돌아다닌다. 돌아갈 집도, 할 일도 없다. 어디서 무엇을 할 수 있나. 이렇게 돌아다녀야 뭐라도 얻어먹을 기회가 생긴다."
_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다. 배고픈 건 참을 수 있다. 목마른 건 참기 힘들다. 마실 것이 있으면 좀 달라."
차에 물이 있었다. 그에게 물을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벌써 다른 아이티인들이 기자 주변을 빼곡히 에워쌌다. 치안이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생수 한 통을 꺼내 들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눈에 선하다.
그에게 "미안하다"며 "나도 목이 마르지만 물이 없어 마시지 못한다"고 했다.
_수많은 구호식품이 오고 있는데, 조금 기다릴 수 없느냐.
"구호식품이 어디로 가는 지 모른다. 아마 대통령궁, 정부관리, 아니면 부자들…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_여기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
"근처에 '까프렌플로'라는 학교가 있다. 이 학교에서만 1만명이 죽었다. 5층건물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학생 교사는 물론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까르푸에서 몇명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십명의 아이티인들이 계속 따라오는 바람에 불안을 느낀 기자는 그와 떨어지려 했으나, 그는 집요하게 따라오며 말을 붙였다. "차가 어디 있느냐,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통신이 끊겼다고 하자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속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이런 것일까. 슬쩍 그에게 명함을 주면서 "빨리 가라"고 했다. 그도 무슨 뜻인지 알았는지, 재빨리 비켜선 뒤 차를 빼 나가는 기자에게 손 인사를 했다.
까르푸(아이티)=황유석 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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