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소극장은 정초부터 하드보일드를 택했다. 극단 청우의 '루시드 드림'이 펼쳐지는 그곳 특유의 반원형 무대에는 연일 젊은 관객들이 모여 앉아 정제된 무대미학에 빠져든다. 지식인들의 심리는 내면적으로 어떻게 충돌하고 갈등을 빚는지, 그들 의식의 풍경은 얼마나 몰강스러운지가 사뭇 감각적으로 펼쳐진다.
연극은 고도의 심리 드라마다. 산울림소극장은 그것을 감당해 낸다. 빛과 소리가 배우의 섬세한 변화에 맞아떨어지게 운용하는 힘은 산울림소극장이 사이코 드라마와 여성 연극의 산실이었다는 이력에서 나온다. 법원을 둘러싸고 법조인들 간에 전례 없는 긴장이 촉발된 요즘, 이 연극은 법조인들 간의 갈등을 들여다보는 가외의 재미도 선사한다.
감각적 차원으로 보자면 범죄와 성이 난무하는 무대지만, 대목과 대목이 서로 버성기지 않는 것은 잘 정제된 공간 분할 덕이 크다. 주인공의 의식을 그리는 '생각의 방', 현 시점에서의 사건을 보여주는 '접견실', 은밀한 기억을 들춰내는 '침실' 등으로 분할된 공간은 결코 서로 침범하는 법이 없다.
자칫 추상적으로 흐를 수도 있을 무대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은 시각, 청각적 요소들이다. 음향과 조명 등 시청각 요소가 배우들의 호흡과 맞아떨어지는 데서 유발되는 공감각적 효과는 이 전통의 극장에 대한 신뢰를 더욱 두텁게 한다. 무대의 설득력은 배우들을 받쳐주는 여러 요소들이 필연적으로 사람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서도 기인한다.
요즘 연극 무대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한국 기독교는 이 무대에서 주인공의 내면을 강박하는 주체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예수의 재림을 확신하는 광신적 목사로, 자식의 성장 과정 내내 강박해 왔다. 심지어 아들에게 "사탄의 자식"이라고까지 할 정도다. 그에게 꽂히는 집요한 핀 조명은 그렇다면 '너의 정체는 과연 뭐냐'고 추궁하는 듯하다.
독특한 구조의 산울림극장 무대에서 실제와 의식을 능란하게 넘나드는 무대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최대의 공은 연출가 김광보씨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는 2007년 이래 4개의 무대를 산울림과 자신의 극단 청우의 제작으로 펼쳐 보였다. 그는 산울림의 반원 돌출 무대를 가리켜 "발가벗겨지는 듯한 부담을 연출가에게 덧씌운다"고 에둘러 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작품으로 이 극장에서 외부 연출가로는 최다 상연 횟수를 기록하게 됐다. 대학로와 달리 소신있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도 했다.
역량 있는 젊은 연출가들에게 자리를 제공하는 소극장 산울림의 '2010 새 무대 시리즈'는 '루시드 드림'의 분발 덕에 향후 더 큰 주목을 받을 전망이다. 31일까지.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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